나는 한글로 쓴다.

<왕궁예식장>이 <킹덤웨딩홀>로,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일제히 영국어로 변신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안양 백성이다. <한국어 맛이 나는 쉬운 문장>을 모처럼 참 몰두해서 읽은 전후로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오늘 십일 다시 오번 버스에서 생각하기를, 우리말은 대단히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언어가 틀림없다. 한글이 무조건 과학적이다고 떼쓰는 것은 별 뜻 없는 두리뭉실한 자랑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도 많지만, 우리말이 적어도 영어보다 훌륭한 점은 단순히 관용적, 역사적인 의미차 뿐 아니라 낱말의 본 뜻 자체에 따라 극히 구체적인 구별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다. 센트럴시티 <영풍문고>에서 산 <남영신의 한국어용법 핸드북>은 이렇게 미묘하게 경우에 꼭 맞는 단어를 골라 쓸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책이라서 못생겼음에도 샀다.
브랜드 이름 짓는 회사에서 인턴 근무를 하면서 함께 발상을 하고, 추린 이름들에 여러 겹의 의미를 덧칠하는 작업을 함께 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이 받는 홀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책상 위에는 항상 여러 종류의 영어사전과 동의어 사전, 라틴어 어원 사전 등이 올라 있다. 우리말이나 한자어를 선호하는 업주 또는 그런 업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럴 때에도 십중팔구 우리말로 된 이름에 갖가지 「속뜻」을 중의적인 부연설명으로 덧붙이는 것이 예사다. 외국 느낌을 풍겨야 잘 팔리는 것이 말하기도 새삼스런 법칙이 되어 버린 현실에 딱 맞게 적응, 진화한 마케팅 업계가 영어에 대한 환상을 어느 정도 털고 대뇌에 남은 것들도 열심히 긁어내고 있는 김괜저로서 참 보기에 딱한 광경이 몸소 되고 말았다.
내일 무가식이 지네 직장 앞으로 불러내지 않는다면 아마 프랑스어 학원에 등록하러 가겠지만, 우선은 우리말을 눈부시게 쓰고 싶다. 십 몇 년 차 이민 생활중인 우리 이모가 <오뚜기 쇠고기스프>를 내가 아는 누구보다 더 우직하게 끓이시듯이, 뉴욕 생활을 뻐길 거리로 삼는 나이지만 모국어라는 으뜸으로 중요한 지적 기반이 흔들리지 않게 하겠다. 적어도 영어 문장에서 오류 집어내는 실력보다는 한국어 글 고쳐 쓰는 능력이 나아야 체면이 서지 않겠나?

  1. EggLover

    ㅋㅋㅋㅋ동감

    한글을사랑합시다

  2. 김괜저

    예에 예에 예에 예아

  3. 마말

    지금 읽고 있는 한글용법에 관련된 서적 몇권 뉴욕 돌아올때 사다주지 않겠는가?

    책값은 당신 오면 꼭 줌세

  4. 김괜저

    그러지

  5. imc84

    안녕하세요. 밸리에서 들렀어요.
    세계 밸리는 잘 안 들르지만 전체 테마 목록에 딱 자리잡은 제목이 하도 간명하고 담담한지라 눈에 확 띄더군요. “우선은 우리말을 눈부시게 쓰고 싶다”는 말씀이 무척 와닿습니다. 안녕히.

  6. 김괜저

    고맙습니다. 안녕히

  7. 카방클

    어느새 한국어 문장과 문법이 틀려가고있는 카군의 뇌리에 콱 박히는 글이었습니다.

  8. 김괜저

    콱 박혔나요

  9. 주작

    안녕하세요. 의미있는 글이군요.
    저도 글을 쓸 때나 말할 때나 되도록 외래어나 외국어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랭귀지는 민족의 아이덴티티’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아야겠죠.
    좋은 하루 되세요.

  10. 김괜저

    좋은 하루 보내세요.

  11. 제절초

    아름다운 문자죠 한글은. 한글로 쓰인 아름다운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도 한국어를 잘 쓰고 싶습니다.

  12. 김괜저

    한국어도 한글도 잘 씁시다.

  13. 쥰_

    스킨을 바꾸거나 할 때마다 영어로 된 블로그 이름이 더 헤더에 예쁘다는 것은 느끼지만 그래도 결코 제목을 바꾸지 못하고 한글로 고집하는 것도, 이것과 비슷한 이유인 것 같아요. 참 예쁜 글이에요, 한글은.

  14. 김괜저

    예쁜 놈을 떡 하나 더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