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몽을 먹으면서 기다릴 것이다.

임산부도 아닌데 자몽이 너무 먹고 싶었다. 자몽 냄새 나는 손 비누 때문이었다. 내려가서 주스를 사 왔다. 이 동네, 삼 년 전부터 꼬박꼬박 지나가던 곳인데 여기에 산다는 느낌은 희한하게 달랐다. 여긴 MitaLisa에게 끌려왔던 싸구려 무도회장이 있었던 (올커니, 인제 망하고 없다) 그 골목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되는 거리다. 얼어죽지 않으려고 꽁꽁 싸매고 나갔는데 기분 탓인지 몇 시간 전에 비해 훨씬 참을 만 한 추위다. 눈은 빨리 좀 녹아 줬으면 한다.
한 주 동안 빌린 TriBeCa 쪽 아파트에서 자몽 주스랑 고기공 먹고 있다. 내가 똑같은 Tropicana도 반드시 멀쩡한 가게에서 사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이것처럼 평생 안 팔릴 것 같은 델리에서 산 주스는 종이곽에서 청결하지만 불결한 그런 냄새가 난단 말이다. 어쨌든 KlausJakob이라는 서른살 먹은 독일 출신 사업가 둘이 사는 집인데 이번 한 주 동안 뉴욕에 와 지낼 가족과 묵으려고 내가 빌렸다. 지금껏 내가 빌려본 모든 방과 호텔과 없는 집여행지 집을 통틀어 이 집이 일등이다. 세 명 사는 우리 집보다 넓고 천장은 내 위에 내가 서고 남을 만큼 높다. 거실 중앙에 삼 미터는 되는 긴 원목 식탁이 있고 대형 창문 앞에는 누울 만한 소파 둘에 Eames Lounge Chair를 비롯한 각종 이름난 가구가 여기저기 있는 식이다. 일 주일 살아보면서 더 구체적으로 자랑하도록 하겠지만 일단은 환상이다.
그런데 지금쯤 도착해서 시차를 극복하고 잠을 청하려고 하고 있어야 할 엄마와 아부지와 성희는 정작 눈난리 때문에 뉴욕까지 오지 못하고 Atlanta, Georgia에서 내일 오후로 미뤄진 마지막 비행기 시간까지 발이 묶인 상황이다. 해외건 미국내건 여기저기 가려던 주위 친구들이 죄다 Facebook에 눈보라를 욕하는 한마디가 속속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하루를 통째로 기다려야 할 줄은 몰랐다. 점심 먹고 공항까지 전철 타고 갔다가 (고장으로 중간에 내려서 한참 기다렸다) 휴대폰이 망가진 까닭에 아부지 전화를 하나도 못 받은 채로 공항에서 Skype로 겨우 연락하니 그제야 아틀란타에 불시착한 것을 알았고, 멍하니 Peet’s Coffee 앞에서 드래곤과 MSN으로 시간 좀 때우다가 얼마 후 아무래도 많이 늦게 될 거 같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전철로 맨하탄으로 들어온 것이다. 뉴욕 간다고 수능 끝나는 날부터 법석을 피웠을 성희도 특히 그렇고 다들 너무 고생한다. 나는 내일 아침 여덟시에 사회학 방법론 기말 시험이 있는데 아무래도 대강 때우는 느낌으로 보게 될 것 같다. 내일의 관건은 비행기 도착이 다섯 시 예정인데 세 시간 후 브로드웨이 공연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막판 매표에 돈 다 썼으니 제발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1. Rose

    잉, 자몽까먹고싶다. 후르륵 과즙.. 침고여.. 하지만 난 오늘 사랑니뽑았어. 욱씬거리는군. 나에겐 지금 자몽은 사치야

  2. 고기딖따

    으아 정말 눈이 난리구나. 나 한국오고 바로 딱 뜨고 나니가 완전 닥쳤다고 그러더라.

  3. 금숲

    ㄷㄷㄷ무셔

  4. 카방클

    끌끌 저도 미루고 미뤄서 크리스마스 저녁 인천상륙작전 -ㅅ-

  5. 김괜저

    버지니아는 거의 눈사태던데 잘 가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