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

시뻘겋게 동백비 내리던 박달리 복층집, 그 앞을 지나며 돌바닥 고인 물에 비친
삼층 청년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들먹임에 화들짝 목을 젖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읍니다
경비에게는 항상 이실직고하였는데도, 스텐레스 병에 싸 오던 고 장조림에 말아드셨는지
아님 그냥 중개사 걱정을 하셔서였는지 암 말 못하시더라고요. 어찌나 가살하시던지
나는 계단 앞까지 일거리를 갖고 나와서, 볕에 바싹 말려야 되는 그림이라고 핑계하며
어찌나 예의주시하였던지 박새만 잠깐 날아도 붓을 떨어뜨렸읍니다
그러나 곧 나도 주위 없는 성격인지라, 한 명 한 명씩 부아난 군을 그려넣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한겻을 그냥 보내버렸지, 느슨하게 해가 걸릴 때까지도 몰랐읍니다
내 끈기에 나도 좀 의아했고요, 그제야 고개를 들었는데 아, 그러면 그렇지
삼층 청년이 창 밖으로 머리를 직각 가깝게 굽히고 나 쪽을 빤히 내리보며 마른 입술로
조그맣게 뭐라 뭐라고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까
경비는 이미 창틀에 발 올리고 곯아떨어졌지, 나와 그뿐이었읍니다
뭐라 하느냐고 물으면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아 난 세필을 허공에 찌른 채로 그냥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읍니다. 나와 청년뿐이었읍니다. 내가 알아버리면 큰 일이 나는
그런 것을 뱉아줄 것만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어버리고 붓을 툭 떨어뜨리고
패배한 표정을 하며 화폭을 보았읍니다. 내가 오십 수 넘게 그린 군인들 모두 꼭 같이
그 청년의 얼굴로 잔인하게 쏘아보고 있었읍니다. 허벅지에 상처가 나도록 바질 움켜쥐고
서러운 것도 없는데 엉엉 운 것을 고백합니다.

  1. 아무개

    비공개 댓글입니다.

  2. 김괜저

    땡큐..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