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를 떠났다.


— Édith Piaf : Hymn à l’amour

얼굴에 수분크림을 잔뜩 바른 여자였다. 「비빔밥 말고 딴 게 뭐라고요?」 「비프 스테이크입니다.」 「빞 스텍 그걸로 주세요.」 「음료는요?」 「와잇 와인이랑 오렌지 쥬스.」 「여깄습니다.」 그녀는 승무원이 저 뒤로 한참 지나간 뒤에 다시 내 자리 너머로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네」 「타바스코 쏘스는?」 「어떤 소스요?」 「타바스코, 타바스코.」 「아, 네. 알아보겠습니다.」 용케도 선미에서 그걸 찾아 가지고 왔다. 이 여자는 밥 먹고 나서 잡지 걸치대에 맨발을 올리고, 아직 앞치마도 안 푼 그 승무원에게 향수를 두어 병 주문했다. 나는 그 옆에서 왠지 모를 재미있고 고약한 기분이 들어 고추와 젖가슴 보이는 카운터컬쳐 잡지를 더 크게 펼치고 읽었다…

한국은 덥고 재미있다. 이번처럼 오랜만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다른 점은 크게 보이고 멀쩡한 점은 다르게 보였다. 파리에서 덥다고 했던 것에 웃음이 나온다. 서울이 딱 두 배 더 덥다. 파리에서 나는 걸어서, 자전거를 타 대서, 힘들어서 더운 거였다. 살갗이 타서 더운 거였다. 그건 매우 부정확한 더위였다. 오랜만에 온 이 나라 여름은 정말 찐다. 어제 텔레비전에서는 생양파를 깔고 돼지고기를 얹어 물 없이 수육을 만드는 재주가 나왔다.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찔 수 있는 충분한 수분이 있다. 파리에서는 열심히 사는 사람만 땀을 흘리는데 여긴 귀천이 없다. 어떤 쪽이 공평한지는 잘 모르겠다.


오자마자 제법 바빴다. 출국 전날 밤은 Annie, Coco, Maxi 등과 라틴구역 강 가까이 숨어 있는 스코틀랜드식 주점 The Highlander에서 하얗게 보냈다. 집에는 가고 싶고 싹 비운 아파트도 뜨고 싶은데, 애기처럼 그 술집을 떠나기가 싫었다. 다시 없을 것 같아서 눈물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고 새벽 여섯시쯤 집에 돌아왔다.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추가로 만들고 다시 버리는 데에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싹 정리하고 나서는 취한 채로 은행에 찾아가 전 주 계좌 해지했을 적에 약속받은 잔금을 챙겨 나왔다. 학교에도 들러서 아마존에서 주문한 렌즈 뚜껑 두 개를 전달받았다. 점심때 쯤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헤롱헤롱했다. 경유지 프랑크푸르트에 와서야 좀 제정신을 찾고 우유에 우린 녹차를 한 잔 마셨다.

한국 도착 시각 역시 정오 조금 지나서였는데 엄마가 마중을 나왔다. 된장국을 먹었다. 이번에 지원해 놓은 게 있는데 일차 통과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사흘 뒤인 이차관문을 준비해야 할 것은 같은데 어찌할 지 몰라 인천대교를 건너는 차에서 송도에 비현실적으로 듬뿍 솟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소개받은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기한이 촉박하니 오늘 저녁 수업에 오셔야 합니다」 원장님이라는 분이 그랬다. 집을 찍으니 오후 세 시였는데 종로에 있는 그 학원이란 곳에 여섯 시까지 오랬다. 샤워만 하고 바로 나갔다.

그러니까 한국이 워낙 오래간만이다보니 한국인이 떼지어 있는 곳에 몸담는 것도 오랜만인 거라, 조금만 비슷한 사람만 봐도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스스로 놀랐던 건 그렇게 오랜만이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나서 3030번을 타고 논현에서 470번으로 갈아타서 한남대교와 남산터널 지나 종로2가까지 너무도 순탄케 움직였단 것이었다. 몸이 아는 노선이었다. 코딱지만한 학원에서 수업을 한 시간 정도 견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맞는 과정이 아닌 거라, 쉬는 시간에 정수기 가는 척 하고 빠져나와서 그냥 원장님과 두 시간 상담만 했다. 20분 정도에 할 수 있는 얘기를 길게 늘인 인생수업이었다. 다 끝나고 이 노선을 오가며 든 습관이 작동해서 까페 뎀셀브즈에서 커피 한 잔 마셨다.

집에 돌아오니 밤 열 한 시였다. 아버지가 에어컨 아래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벌떡 일어나셨다. 「다녀왔습니다」하고 내 방에 들어가 길게 누웠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를 보는 게 육 개월만이었다. 부리나케 거실로 날았다. 아버지 어이가 없으셨지요 저 귀국한 지 삼 개월은 된 듯한 기분입니다…

  1. Rose

    아부지 이야기 다시 봐도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ㅋㅋ

  2. 김괜저

    우리 아부지..

  3. 박뎐

    소박하고 유쾌해요

  4. 희한

    작년에 ‘파리, 무인양품’으로 검색해서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된 이후로 꾸준히 드나들었답니다. 프랑스 북쪽 작은 도시에 있다가, 이번 7월에 파리로 이사를 해서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혹시나 ‘괜시리저렇게’님을 만날까 약간 두근두근, 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런 두근두근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려서 섭섭하네요, 핫핫. 어쨌거나, 앞으로도 좋은 글, 좋은 사진으로 제게 끝없는 ‘영감’을 주시길 바랄게요 🙂

  5. 김괜저

    아주 적절한 검색경로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오세요

  6. 아무개

    비공개 댓글입니다.

  7. 김괜저

    다행히 과연 잘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