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동인을 신나서 읽었다.

요새 별다른 약속이나 집안일이 없으면 십중팔구 무가식과 양재 카리부 같은 곳에서 노닥거리면서 놀 것을 찾는데, 오늘의 경우 코엑스에서 만났다. 몇 시간 놀고 헤어지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서 범우문고 중에 김동인 단편집과 김일엽 수필집을 샀는데, <붉은 산>을 필두로 한 김동인 단편들이 번뜩 정신을 들게 할 정도로 훌륭해서 2호선과 11-5번을 갈아타고 집에 오는 그 길에 다 읽어버렸다. 길지 않은 문고판 단편집인 것을 감안해도 이렇게 홀리듯 단숨에 뭘 읽은 것은 대단히 오랜만이었다. <감자>, <배따라기> 외에는 모두 처음 읽는 것이었다. <광화사>가 제일 환상적이었는데, BalzacLe chef-d’œuvre inconnu에서처럼 파멸적 (굳이 더하면 남성주의적) 탐미주의로 끝장 보는 작품이었다. 「이 화공이 흔히 얼굴을 싸매고 장안을 돌아다녔다. / 행여나 길에서라도 미녀를 만날까 하는 요행심으로였다. / 길에서 순간적으로라도 마음에 드는 미녀를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을 머리에 똑똑히 채취하여 그 기억으로써 화상을 그릴까 하는 요행심으로…….」 이런 구절에선 얼마 전 내가 쓴 설익은 것도 생각나였는데 이건 뒷부분에 약간의 메타소설적인 재미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예전에는 그저 타박네 같은 내팔자야 이야기로 생각했던 <감자>의 경우 극도로 간략하면서도 사회학적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눈 넓은 작품이었다. 그 밖에 익히 들어본 <광염 소나타>는 분석하기 훨씬 편하고 작품 자체도 직설적, 쉬워서 약간 시시한 감도 있었으나 그 시시할 정도의 직설적인 면모는 어떻게 보면 용기, 대담함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찌됐건 한동안 내게 김동인은 한국 근대문학가 가운데 그나마 가장 덜 계몽돋는 이였는데 한탕 살다가 약김에 친일행적 인상깊게 남기고 연속극처럼 죽은 인물에 그쳤는데 오늘 저녁 남태령 넘느라 덜컹거림 쩌는 버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작품들을 읽어보니 내가 찬양하는 외국 현대작가들 글들이 전제하는 탈윤리성, 예술우선론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련된 것들이 많았다. 작품은 작품이라고 선 긋지 못하는 시절 사람인 것은 슬픈데 적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1945년 8월 15일 오전 열 시에도 총독부를 찾아가 예쁜짓을 스스로 건의하였다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읽었기 때문으로, 마치 희비극(tragicomedy)를 인생에 길게 실천한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이었다.



— Jay Brennan : Soda Shop

한편 지난 며칠 사이 친애하는 천적이가 머리를 짧게 하고 동그라진 안경을 쓰고 귀국해서 그 여자친구와 함께 압구정서 만났다. 좋은 친구가 좋은 사람과 죽이 맞아 잘 노는 모습을 우나기동 먹으면서 지켜보니 뿌듯하고 반갑고 했다. 우나기동을 즐겨 먹는 것은 아마 친일행적으론 부족할 것이다.

  1. 사라미

    초밥 즐겨먹는건..?

  2. 김괜저

    우리 언제라고 했었지…

  3. 사라미

    목요일저녁 임뫄

  4. 인어

    아.. 여자친구가 있군요. 아쉽네요. ^^

  5. 와 범우문고 책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