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부끄러워졌다.

입대 후 몇 달간은 주어진 환경이 뻑뻑해서도 있겠고 내가 일부러 마음을 굳혀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 음악, 영화, 요리, 커피, 문학, 사진, 여행, 파리, 뉴욕(특히 뉴욕) 같은 바깥생각을 일부러 멈춰 놓고자 했었다. 못 먹을 바에는 눈 앞에서 치워야 고통이 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청승맞게 밤에 누우면 머리 속에선 이미 노래가 나오고 배우들이 등장하고 카페인 국물이 차오르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로워 이스트 싸이드 쓰레기 썪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런 그리움의 대상이 <자유>라던지 <예술>과 같은 고결한 풍의 것 아니면 적어도 <가족> <친구>와 같은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내가 환장하는 소비재와 문화상품, 먹고 보고 갖고 싶은 그런 속물적인 것이라는 데에서 「그래 내가 그렇다」하는 자조와 쓸쓸함 있었다. 가끔, 물론 까스나 화약을 먹고 와서 제 정신이 아니었던 날의 일이었겠지만, 그런 내 모습을 더 극단적으로 내몰아 보고자 하는 심산이었는지 청배게를 벤 머리 속으로 JFK에 내려서 짐을 찾고 LIRRPenn Station에 도착해 다운타운의 길을 꼬불꼬불 걸어서 결국 2009년 나와 Azaro 형제들이 살던 그 볼품없는 집 앞까지 도달하는 여정을 끊김없이 재생해 보는 짓을 했다. 아는 곳들을 지나고 좋아하는 것을 사 먹고 괜찮은 곳들의 이름을 입끝으로 발음하면서 가는 그런 아주 처절하게 궁상맞은 짓이었다. 끝나고 나선 돈 주고 한 사람처럼 몹시 부끄러워졌다.

더 부끄러울 때는 전우들이 발냄새를 풍기며 곤히 자는 동안 혼자 머리로 그런 짓거리를 하면서도 반드시 하얗게 맹점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나지 않는 세부사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MacDougal이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미칠 것 같은 마음에 머리 속으로 뭔가 핑계를 대어 그 주변 길로 돌아왔을 것이란 말이다. 물건을 훔치다가 가게 바닥에 시끄러운 걸 다 쏟은 꼴처럼 몇 갑절이 더 창피하였다.

그러나 이런 증세는 잠깐씩 어지러운 가벼운 빈혈 정도로 위중하지 않았고 훨씬 중요한 신체와 간단한 악바리를 요하는 평상시의 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대신 그 땐 종이가 없어 보급받은 면도칼 포장지를 펼쳐서 깨알같은 글씨로 느끼는 걸 다 적었다. 스스로에 대한 시야의 측면에서 그 몇 주 동안 나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바뀐 것 같은데, 아마 그 때 쓴 글을 나중에 보면 거기에 그 정황이 잘 드러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당시의 일을 어정쩡한 시간만이 지난 지금(나는 아무리 입대 초의 얘기라 해도 아직 뭘 ‘돌아볼’ 만한 짬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그 때가 지금까지 머리속에 생생할 만큼 금방도 아니다)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요새 조금씩 간접적으로나마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접하고 그 때의 취향과 관점을 회복하고 있는 과정에서 그 당시에 느꼈던 부끄러움과 답답함이 더 이상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시원하고 아쉬웠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가려워 긁던 까진 데가 아물어서 더 이상 간지럽지 않게 되었는데도 계속 거길 벅벅 긁으면서 가려웠던 게 어땠는지 궁금해지는 딱 그 시점이다. 피가 날 텐데도 딱지를 떼는 기분이고.

요샌 그 때처럼 간절하지는 않다. Nick and Nora’s Infinite Playlist를 보면서 (맨해튼과 브루클린에서 다 찍은 이 영화는 동네를 아는 사람에겐 홈무비처럼 절친한 곳들이 넘친다) Mercury LoungeEden Deli같은 곳들이 나와도 그냥 아주 참 어서 빨리 다시 가고 싶다는 커다란 감정일 뿐 그 때처럼 천국에서 쫒겨난 것 같은 박탈감은 이제 없다. Bored to Death를 보면서 2009년 일월에 몇 시간을 걷다 발견한 커피집이나 미친 조명으로 학생들에겐 유명한 Curry Row의 인도음식점 Panna 같은 곳들(사실 두세 곳 중 어딘지 아무도 모를 거다)이 예사로 등장해도 돌아앉아서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데 만족할 수 있게 됐다.

방금 말한 두 작품 모두에 맛나고 유서깊은 옛 기숙사 앞 24시간 동유럽식당 Veselka가 나온다. 맛있는데!

  1. 심바

    흑 선배 할 수만 있다면 뉴욕에서 싸들고 배달해드리고 싶군요ㅜ

  2. 김괜저

    나 MAOZ 팔라플에 브로컬리랑 마늘양념 많이 뿌린 거 좀 배달…….

  3. optimist

    뭐랄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웹사이트의 화면 말고, 적당한 간격의 줄이 그어져있는 노트에 옮겨 적어 다시 보고 싶네요(꼭 이 글 말고도 말이에요).
    아날로그틱한 감성에 어슬어슬 물들어가는 듯해 좋은 기분으로 왔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