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가 아름답다.

아침에 부천에 갔다. 안양에서 부천을 가는 것은 거리에 비해 고되다. 그나마 작년 생긴 외곽순환고속도로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빠르지만 약속된 배차간격보다도 훨씬 오래 기다리게 된 데다 고속도로에 오르기까지 길이 막혀서 도착하자 열시 삼십분 정도였다. 간 이유는 민망하지만 판타스틱영화제……. 민망한 이유는 현장예매 실패……. 실패의 이유는 피판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어쨌든 만나고 싶었던 태훈(24, 어제의 선임, 오늘의 미안하게 된 친구, 내일의 동창)도 내 불찰로 못 만나고, 부천에 가 보고 싶었던 음식점도 폐업했고, 기분 탓인지 폐막식 다음날 한산한 행사장들은 흐린 하늘 아래 좀 스산한 느낌이 있었다. 관련없는 전시와 행사장 몇 곳 구경하고 나서 소풍터미널에서 엄마들 애기들에 섞여 업무 좀 보다가 한번 더 시외버스 타고 홍대로 떠났다. 민망한 이유로 부천의 사진은 없다.

홍대에 볼 일은 없었다. 원래는 홍대가 아닌 인천에서 점심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는데, 부평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어지자 거기까지 갔다 돌아오기가 귀찮아졌다. 홍대에서는 민망한 일은 없었지만 홍대앞 자체가 민망할 때가 많으므로 역시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홍대의 이것저것들을 사진에 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없는 인도 음식점으로 숨어들었다. 예티에서 팔락 파니어를 주문하다가 물을 쏟았다. 혼자 뚱하게 와서 채식주의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시금치 치즈 커리를 시키다가 방석을 다 젖게 했는데도 친절하셨다. 비웃지 않았다. 난 게다가 분홍색 Kenneth Cole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도. 고마웠다. 원래 카페 히비를 가려고 했는데 어제 나름 일식을 먹었어서 인도식으로 정한 거였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컴컴한 곳에 앉아 볼리우드 노래를 들으려니까 좋았다.

별로 할 일도 없었으면서 (있었던 약속은 내일로 미뤄졌다) 홍대 부근에서 자그마치 여섯 시간을 보냈다. 내가 쓸 것은 아니지만 바디샵에서 살 게 있었는데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아 실패했다. 폴앤폴리나에서는 바게뜨 한 쌍과 뺑오쇼꼴라를 샀다. 셀통(정말 추억의 이름이다)에서 제책용 천지 몇 장도 샀다. 미림화방이었나 딴화방이었나 기억은 안 나지만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패브릭 테이프(제책에도 유용하다)가 반가워서 바가지를 쓰고도 사 버렸다. 정작 필요한 건 발사나무판과 아크릴 물감이었는데 다른 데 돈을 너무 많이 써서 포기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을 포기하는 생활은 아름답다. 군포도(아침에 차 타고 졸아서 군포까지 갔다) 아름답고 안양도 아름답고 부천도 아름답고 마포구도 아름답다.

  1. DHP

    정녕 저 빼빼마른 청년이 선배 본인이란 말씀입니까?
    아 군대여…

  2. 김괜저

    본인 아닌데ㅜㅜ

  3. DH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행입니다

  4. 유진

    부천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다. 문득 어릴 때 공터에서 삐라 줍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