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세 살 할머니가 시외버스 옆자리에 앉았다. 함흥에서 난 분이다. 광복 이틀 전 통역관인 아버지께서 소식을 먼저 알고 한탄강 건너 월남 (따발총 세례 받을 때에 둘도 없는 불자였던 큰언니는 나도 몰래 난생 처음 「하느님!」 했단다), 이승만 때 국회위원 밑에서도 잠깐 일하고 혜화 작은아버지 댁에 김 구 선생을 모셨던 걸 기억하는 분이었는데 칠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젊고 옛날 것 지금 것 할 거 없이 그냥 전부를 알고 있는 슈퍼할머니였다. 자리에 앉을 때 웃는 낯으로 대하는 걸 보고 「된 청년이다」 싶어 시작했다는 얘기가 호계동 도착까지 이어졌는데 역사와 세계정세와 종교, 윤리 등을 넘나드는 진심 재미있는 대화(라기보다는 강의)였다. 연신 청년, 청년 하시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할 것 같을 정도의 과한 칭찬으로 연신 본 자아를 북돋어 주었다. 기분 좋게 집에 왔다.
아침에 같이 부대를 나온 후임친구 세 명 + 이미 나와 있던 선임어르신 한 분을 금세 만났다. 돈코보쌈에서 모둠보쌈, 히비에서 음료. 폴앤폴리나에서 빵 등. 재혁이 빼고는 밖에서 후임 만나는 게 처음이다. 선임들은 많이도 만났는데. 괜히 휴간데 선임이 불러내는 느낌이 들까 봐 그 동안 부른 적 없었다. 오늘은 즐거웠으니 걱정 없다. 갈 길 가고 나서 홍대를 한참 더 배회했다. 두성페이퍼갤러리에서 지난 번 맛뵈기 구매했던 종이들을 큰손구매했다. 오 년 전 안경을 맞추었던 곳은 없어져서 테를 새로 하려 했던 계획은 죽었다. 구르메 마켓(Gourmet Market)이라는 평이한 이름의 작은 식재료 상가를 처음 가 봤는데 규모에 비해 상품이 알차서 좋았다. 깜짝 놀랄 만큼 싼 탈리아뗄리도 있어서 한 상자를 샀다. 냉동 반건조토마토에만 가격표가 없어서 사장님께 여쭸더니 화들짝 놀라시며 「그, 그게 가격표를 진작 붙이려고 했다구요! 여기 다 뽑아놨는데 스카치테이프가 없어서」라며 왠지 내게 가격표 한 뭉치를 보여주셨다. 당황하시다니, 어딘가 정이 갔다. (토마토가 너무 비싸다는 데엔 사장님도 나도 동의했다.)
4. 홍대 카페 히비 입니다. 식사도 맛있어요.
괜저님이 입으신 셔츠가 멋집니다.
평범한 회색 셔츠인데 괜찮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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