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법 우아할 때도 있다.

Photography by Maleonn, via Empty Kingdom

아침에 후임친구와 함께 홍차를 우려마셨다. 이런 문장은 사실 진짜 웃기다. 군인이 토요일 아침에 생활관에서 하(夏)체련복을 입고 우아하게 홍차를 마셨다는 것……. 예전의 나라도 웃었을 것지만 사실 우리는 제법 우아할 때도 있다. Mariage Frères 프렌치 얼 그레이를 진하게 우려 젖과 당을 넣어 먹었다고 하면 더 놀라겠지. 물론 함께 먹은 것은 몽쉘 카카오케이크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군필들은 군에서 그 어떠한 우아한 짓이라도 하며 지냈다는 경험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안 똑똑하게, 고상한 사람은 저열하게, 생각이 있는 사람은 뇌를 끄고 살았다는 식의 보고가 흔하니까. 밖에서 어떤 사람이었건간에 대개 군대는 닥치고 고생하러 다녀오는 곳이다. 이런 면에서 나를 비롯한 소수의 현역들은 매우 특권층이다. 많은 것이 허락돼 있고 많은 것이 제공되어서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허송세월하지 않을 권리를 서로 무척 존중하는 사람들과 오손도손 살고 있어서 그렇다. (고생을 안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우리 부대는 지금에 비하면 약간 팍팍했을지언정 그때도 사람들 개개인은 사회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충분한 사람들이어서 크게 한숨 놓았던 기억이 있다. 들어온 첫날 밤에 「알모도바르 영화 중 유명한 것들은 대부분 보았습니다」 같은 말이 필요하리라고는 상상 못 했었다.

절대적으로 환경이 좋은 측면도 많다. 군부대지만 대학을 겸하다보니 도서관이 매우 훌륭하다. 사서들의 안목이 빼어난데 특히 영화제 수상작 DVD는 국가를 막론하고 풍성하게 갖추고 있는 편이다. 취침 전에 취향이 맞는 사람끼리 생활관에 모여서 영화 보는 재미가 좋다. 물론 보이스 코리아를 선택하는 생활관도 있으니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같이 운동하고 돌아와 좀 피곤하긴 해도 토요일이고 하니 한 편 보는게 옳겠다. 어린이날이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다.

  1. 태균

    우아하게 책과 영화를 빌려 볼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나게 부럽습니다.

  2. 김괜저

    아앙……. 죄송하게 됐습니다.

  3. 달시름

    와 신기하네요. 보직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4. 떡잎

    남동생이 군대에 갔을 때 주입하는 생각, 말 들에 치여서 뇌를 끄고 살까 주파수를 변경할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나오고나니, 내가 알던 덩치 크고 귀여운 녀석 그대로여서 안심했던 기억이 있어요.

    진하게 우린 프렌치 얼 그레이와 함께 허송세월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받고 계시다니, 그정도면 운수가 대통도 이런 대통이 없는데요? 제대하시면 로또라도 한 번 사 보셔야 겠어요. ㅎㅎ

  5. 김괜저

    사람이 쉽게 안 바뀌니 안심ㅎㅎ

  6. 아무개

    비공개 댓글입니다.

  7. 김괜저

    어라 사셨군요 축하합니다. 체중계는 별로 맘에 안 드는 것 샀던 적이 있고, 그보다 전부터 사고 싶었던 것이 Salter 사의 체중계입니다만 가장 평범한 애가 좀 깔끔했던 뿐 확 띄게 예쁘진 않았어요.

  8. 681

    그게 다 내가 만들어놓..은건 아니고

    너무 잘지내는구만 ㅋㅋㅋ

  9. 김괜저

    이상한 소리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