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칼이 떠올랐다.

김치볶음밥을 하려고 했는데, 이사통이라 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초리쪼와 새우를 넣은 빠에야색 볶음밥으로 바꾸었다. 아니, 팬에 육수로 밥 지어 만들었으니까 근본없지만 그냥 빠에야라 부르겠다. 죄책감은 발암물질이다. 새 집에서 처음 하는 요리였으니 좋게 좋게 가자. 이번에 조리대와 개수대를 전부 교체한데다 청소도 잘 해놓은 터라 무척 편했다. 수십만원짜리 칼을 빌려쓴 효능도 컸다. 포르투갈산 햄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새벽마다 도착하는 대형마트가 냄새 맡고 찾아갈 거리에 있다는 것 덕분에, 저렴하고 맛 좋은 초리쪼와 올리브유, 사프란이 미량 함유된 빠에야용 식용색소 같은 것을 사서 쟁여두었다.

이번 집에서 얼마나 살 지 확실하지는 않다. 집과 동네가 무척 마음에 들지만 언제까지나 뉴욕은 아니므로 아주 오래일 것 같지는 않다. 거실과 주방에 비해 방은 좁으니 지난 번만큼 가구를 만들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주거개선활동은 잠깐이라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생각한다면 다음 집으로 들고 갈 수 있는 것들 중 큰 투자가 필요한 항목들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한다. 날렵하고 폼 나는 식칼이 떠올랐다.

내 거라고 신나게 부를 만한 식칼을 가져보지 못했다. 내 사진기! 내 안경! 내 만년필! 심지어 이제 내 톱!도 있으니 내 식칼 장만의 기쁨을 맛보기에 충분한 시점이다. 내 애완 식칼로 양파도 썰고 생선도 가르고 싶다. 같이 나들이도 가고 심심할 때 대화도 하고 친구들에게 소개도 시켜주고, 안 좋은 일이 있거나 기분이 처지는 영화를 봤다면 칼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5.5″ KYOTOP Santoku Knife from Kyocera
  • 랭보

    내 애완 바질, 내 애완 로즈마리, 내 애완 스킨답서스.

    실제로 외출할 떈 애완용 스킨답서를 들고 나가 자랑한 적도 있었는데…..

    하아…애완용 식칼이라니…..강적!!

  •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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