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편적인 추억-예술을 생각했다.

작년 말에 Gabriel Kahane이란 싱어·송라이터가 BAM에서 사흘간 공연을 했을 때, 그에 대해 잘 모른 채 마지막 날 공연에 갔다. 그는 Craigslist에 올라온 개인 광고들을 소재로 곡을 쓴 Craigslistlieder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개인 광고란은 단편소설가에게는 슈퍼마켓이나 다름없는 재료의 보고이기 때문에, 즉각 친근함을 느꼈다. 나도 뉴욕 Craigslist의 <스쳐간 인연>(Missed Connections) 란을 게으르게 뒤지곤 한다. 이처럼 도심에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끊어졌다하는 움직임에 귀엽게 집중하는 건 Charlie Kaufman이나 Miranda July 같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선점한 하나의 장르로 봐도 될 것 같다. 한편 그런 종류의 소품문(小品文)들은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현대인 스케치’에 머물 위험이 크기 때문에, 어느 장르가 안 그렇겠냐마는 새로움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15 01 16 Levitown WEB - 050625

이 공연을 보고 나서 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마무리를 못 했다. 그의 앨범이 결과물은 참 고운데, 그가 태어났으나 발 붙이고 살지는 않았던 로스엔젤레스라는 장소와 결탁된 추억을 재생시켜 내놓는 태도가 게으르다고 느꼈다. 단지 사라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있고 그런 것들이 알아서 쓸쓸한 불을 피우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한 곡당 실제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건물 하나를 할당해 그곳에 사는 실제 또는 허구의 인물을 그려서 모으는 것은 내가 무척 좋아할 만한 방식이긴 했고 음악과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좀 공허했다.

그런 공허함은 끝에서 세 번째 곡이었나,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씨가 운영하던 주류점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나오자 더욱 증폭되었다. 두순자씨의 총탄에 숨진 흑인 소녀, 너무 어려서 죽은 그 소녀가 하늘에 올라 LA 폭동을 바라본다는 가사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무대에 선 백인 예술가들은 하나둘 무대 바닥에 누웠다. 해당 사건에 대해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많지만, 단지 그 소녀가 너무 어려서 죽었네, 하늘에 갔네, 하는 노래는 아니다. 경건한 그 모습이 순진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날은 뉴욕 경찰에게 제압되는 과정에서 목이 졸려 사망한 에릭 가너를 추모하고 퍼거슨 사태의 연장에서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을 저항하는 큰 시위가 있었던 날이고, 그 시위에 가는 대신 온 곳이 그 공연장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과거를 조각내 추억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고 거기에서 예술에 필요한 뭔가에 대한 도전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두서없이 했다. 부정확하고 파편적인 노스탈지아에 대해 가끔은 너그럽고 종종 엄격한 나 자신을 좀 더 파헤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 S

    도전도 그렇고 반성도 그렇고 충분한 양의 건강한 에너지를 요구하는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