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이 선선해진 날에 걸었다.

날이 제대로 선선해진 그 날 퇴근길에 상수에서 삼각지까지 걸었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도 했다. 허기를 채울 곳이 마땅치 않아 순대국 정식을 먹었다. 티비에는 인천공항에 상주하는 이대 나온 할머니에 대한 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는 것보다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다양하다고 했다. 공항에서 본 일과 만난 사람을 재료로 글이나 예술 작품을 만들 것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너무 상식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국물에서 잡내가 많이 나서 들깨 가루를 먹는 도중에 두어 숟갈 더 넣었다. 따로 손바닥만큼 나온 순대는 제법 맛있었다.

외가 친척들과 오리고기 호박찜을 먹으러 갔다. 같이 나온 맥주의 맛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인 큰외삼촌이 수제 맥주 사업이 요즘 예전같지 않다고, 신촌만 봐도 수제 맥주집이 다 망하고 있다고 큰소리쳤다. 아는 얘기 하는 것을 그렇게도 좋아하면서, 당신의 몸이 망가져 외숙모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줄은 모르는 큰외삼촌. 「그건 신촌이 망해서 그런 거죠」 속상함이 올라와 농담처럼 쏘아붙였다. 찰나였지만 대화의 기운이 확 수그러들었다. 이십년 째 우리 큰외삼촌은 연대에서 일을 하고, 이모는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한다. 나는 괜히 내 흉을 보는 우스갯소리를 몇 개나 늘어놓았다.

잠깐 만나나 싶었던 남자가 있었다. 말수가 적지만 귀염성이 있고, 어딘가 뜻이 묵직한 데가 있어서 기대를 했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만나 즐겁게 먹고 마시기도 했고, 제대로 된 잠자리는 아니었지만 몸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을 다녀온 그와 수원역에서 중국음식을 먹다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인 주제 몇 가지에 대해 논쟁했다. 나는 말로는 그런 주제에 대해 생각이 달라도 사람을 만나려면 노력해야 하는 것을 안다고, 제 발 저려서 실토했다. 이미 그가 내 표정을 읽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