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얻지 못한 답이 있다.

Ezra Klein이 힐러리 클린턴의 What Happened를 읽고 쓴 글을 읽었다. 클린턴이 2016년 대선 전에 미국의 천연자원 산업을 바탕으로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그것을 제공할 재원이 현실적으로 마련되지 않아 공약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클라인은 이것이 클린턴의 이런 점, 즉 체제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며 인기를 잃을지언정 비현실적인 약속을 남발하지 않는 점이야말라고 그의 최고 가치라고 썼다. 좌우 양쪽의 파퓰리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해 졌다고 쓰인 것을 굴복하지 않았다고 읽으며 책임감이 구시대적 가치로 여겨지는 세태를 개탄하는,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다. 그리고 나도 가장 쉽게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평범하고 리버럴한 의견인 것이다.

정치 얘기는 여기까지다. 난 요즘 내가 어떤 사람이고 리더인지, 내가 아는 리더들이 어떤 리더인지에 관한 생각으로 얼른 사고의 도메인을 변경케 된다. 왜냐면 나는 지난 두 주 가량 동안 비전과 전략을 제시한다는 새로운 일 앞에 내가 하릴없이 쪼그라들고 내 스스로의 역량을 의심하는 나날을 보내고 나오는 참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략이 주어지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잘하고, 전략이 없을 때 나만의 기준들에 맞게 양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딱히 기업가적이라 할 수 없는) 일은 더 잘 한다. 다만 나뿐 아니라 나를 따르는 팀과 내가 따르는 스테이크홀더가 이해하고 납득하고 신뢰할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비전과 전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그에 관한 잡학은 해 왔기 때문에 아는 것은 많다보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행격차를 극심히 겪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동료들은 이런 나를 기다려주었다. 때로는 인내로 때로는 갈등으로 그들은 이렇게 갑자기 있었던 리더십이 마비된 듯한 내 모습을 낯설어했다. 컨설팅을 했던 친구는 내게 무엇을 할 지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제일 쉽고 별 거 아닌 일이라고 해 주었다. 나 역시 시간을 통해, 내가 가자고 제안하는 길과 그 길 끝에 있을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고 사람들의 목표점을 일치시키는 일과 내 공약이 나를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일을 간신히 분리해낼 수 있었다.

그 일을 마무리하며 (물론 아직 몇 고비가 남았다) 생각컨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는 태도만큼 이 단계에서 걸리적거리는 일도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엉성한 습관들로 빚어진 조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희망이나 두려움 같은 화력있는 감정이다. 그런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하는 자는 정치공학의 틈새에서 당선될지언정 사람들을 한쪽 방향으로 의도를 갖고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은 대체로 약속의 현실성을 검증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엄지 척을 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만약 책임있는 리더가 자신의 현실 감각을 활용해 체제 속에서 변화를 일으켜 적당한 진보를 이뤄낼 생각이라고 할 때, 그 실행력을 더 얻기 위해서 허풍을 치고 기꺼이 허풍쟁이가 되는 것, 그것은 되레 실용주의적인가? 아직 얻지 못한 답이다.

  1. 모리

    괜저님, ‘하릴없이 쪼그라들고 – 때문이다.’ 너무도 공감이 된다는. 이 부분에서 공감이 된다는 것이 너무 슬프지만요.

    1. gwenzhir

      저는 다행히 그 구간을 이제는 좀 지나온 기분이 들어요. 모리님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