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론토가 지낼 만했다.

6일간 토론토에서 머물렀다. 왜 하필 뜬금없이 토론토에 가느냐 묻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갔다 오고 나서야 왜 토론토였는지 분명히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1. 토론토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뉴욕 친구들 중 제니나 모건을 만나러 샌프란시스코에 간다거나 야라와 브렛(약혼했다고 하니 기쁘다!)을 만나러 로스엔젤레스에 가거나 하는 여행도 무척 즐거웠지만 이번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고 싶었다. 또 한 번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인생을 되돌아보며 글쓰기를 준비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생겼는데 어딘가 조용히 나 혼자 며칠을 지내야 생각이 정리될 것 같다고 느꼈다. 토론토에는 아는 사람이 아예 없다. 천적이 시카고에서 잠깐 와서 같이 만날까 잠깐 고민했으나 결국 혼자 지낸 한 주였다. 콜드 브루 주세요 같은 말만 빼고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 한 주는 정말 오랜만이었고 귀했다. 작년 여름의 쿠알라룸푸르 여행 이후 처음인 것 같다.

2. 토론토에는 볼 것이 적다.

하지만 작년 쿠알라룸프르 여행과 다른 점은, 말레이시아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돌아다니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를 콧구멍을 실렁대서 다 흡수해 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었지만 토론토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열두 살 때 가족 여행으로 이미 본 적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토론토 관광지로 치지만 시내에서 멀어 무관하다. 굳이 토론토에 있는 동안 꼭 들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곳이 아예 없어서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물론 내가 있는 동안 토론토 랩터가 사상 처음으로 NBA 결승에 진출하면서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지만 그것을 지나다니며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3. 토론토에 꼭 필요한 것은 다 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없거나 불편하거나 그냥 평소 여유가 나지 않아 여행할 때 좀 사 오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 뉴욕에 잘 아는 어디어디를 꼭 가야 하고 그런 건 별로 없었다. 그냥 적당한 큰 마켓에 가서 스파이스 믹스나 한국에 잘 안 들어오는 통조림 같은 것들을 산다던지, 중고 책을 산다던지 하는 것들은 토론토에서 정말 쾌적하게 완수할 수 있었다. 옷도 사실 특별한 옷이 필요한 게 아니고 한국에선 비싼 클럽모나코 스웨터라든지 하는, 스트리트웨어 안어울림증이 있는 나에게 단정하고 말이 되는 캐주얼 옷가지들만 사면 되는 쇼핑 목록이었던 것이다. 토론토는 그런 것들을 적당히 다 갖추고 있고 너무 특별해서 힘든 것들은 적당히 없어서 편안했다.

4. 토론토는 걸어서 다닐 수 있다.

북미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인구 많은 도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토론토 중심부에서는 대도시의 내부 압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뉴욕 같은 경우 모든 요소들이 뉴욕 시민들 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의 기대치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그런 게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낸 트리니티 벨우즈 동네는 예쁜 공원을 낀 주택지여서 평화롭고 조용했지만 걸어서 삼십 분이면 아담한 차이나타운을 뚫고 다운타운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다운타운에서 이십 분 걸으면 해저 터널을 통과해 도심 공항에 갈 수 있다. 문밖을 나서 한 시간이면 넉넉히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지내는 내내 하루에 삼만 보씩 걷고 트램이나 지하철은 한 번도 타지 않았다.

5. 토론토는 뉴욕이 가깝다.

그랜드 센트럴로부터 기찻길이 나 있어 10시간 타고 이동해 닿았었던 몬트리올이 뉴욕에서 가장 가까운 캐나다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거리상으로는 토론토도 거리가 비슷하다. 공항에서 공항까지 45분 비행으로 끝이니 서울에서 부산 가는 정도의 스트레스만 받으면 오갈 수 있다. 이번에 토론토에서 뉴욕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토론토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여행 속 여행으로 계획을 짰는데도 편도 이동으로 하루를 날리는 일은 없었다. 만약 토론토에 살았더라면 뉴욕에 재밌는 일이 생겨서 며칠 뒤에 잠깐 갔다와야겠다고 정해버리는 달콤한 결정은 그닥 무리가 아닐 것이다.

6. 토론토는 미국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주는 참으로 괜찮은 도시 토론토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물론 미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온몸으로 밀어내는 미국 이민법의 요구에 맞춰 수년간 취업비자와 영주권을 위해 한 조직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 상황을 지금부터 새로 계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친이민 정책을 통해 심지어 캐나다 내 취업 제안 없이도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고 처리 기간도 빠른 캐나다를 지금까지는 오로지 (욕망의 금메달인) 미국이 아니라는 이유, 그것도 너무 미국 비스무리하면서 미국이 결정적으로 아니라는 애 같은 이유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유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20대를 보낸 탓에 북미 사람처럼 생각하는 편인 나로서는 인생 캐나다에 걸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