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 저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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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커 싫고 자파가 좋다.

서울극장에서 《알라딘》을 본 것은 내 영화관 기억 중 가장 오래된 장면이다. 유치원생이었던 나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준 작품이었는데 첫째가 색이다. 도입부의 불꽃과 시뻘건 아그라바 전경, 그리고 새파란 동굴과 하늘. 어찌나 그 색이 뇌리에 깊숙히 박혔던지 그 파란 하늘 이미지를 초등학생 되고 나서 어떤 컴퓨터 교본에서 다시 봤을 때 그 이미지가 너무 갖고 싶어서 교본에 적힌 디렉토리와 파일명대로 탐색기에 수십번 쳐보고 되지 않아서… 울었다. 요즘은 구글에 치면 나올 테니까 이 아픔은 멸종이네.

둘째는 목소리인데 자스민, 알라딘, 지니, 자파의 목소리가 각각 다른 악기처럼 레지스터가 달라서 난생 처음으로 ‘음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만든 계기가 됐다. 스탠다드한 알라딘 목소리는 쉽게 흉내낼 수 있었던 반면 약간 볼에 나잇살이 쳐져야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파의 목소리는 아무리 따라해도 되지가 않았다. 자파를 너무 따라하고 싶었다. 알라딘은 당연히 욕망의 대상이었는데, 그렇다고 수동적인 자스민에도 이입이 되지 않았다. 내게는 오로지 친구 없는 게이로 나이들며 ‘당연히’ 마법을 습득하여 알라딘이라는 청년을 음모와 계략으로 제압해 내 것 만드는 것만이 주어진 길로 느껴졌던 것이다.

자파처럼이라면 나이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각진 어깨 뽕, 용수철 수염과 짙은 아이라인, 길고 미끄럽고 뾰족하고 불을 뿜는 금빛 작대기… 드랙퀸 디바인이 모델이 된 우르술라부터 스카, 랫클리프 등 80년대 이후에 디즈니가 악당들을 퀴어-코딩해 온 맥락은 잘 알려져 있지만 특히 자파는 유치원생이 보기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퀴어했다. 자파는 특히 자신이 왜 악당인지를 한 순간도 설명하지 않고 그 어떤 동정도 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악당이다. 라이브 액션 버전에서는 자파가 자신도 길바닥 출신이었다는 기억으로 알라딘과 일순간 교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후진 장면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힘을 가진 외롭고 슬픈 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악당이 좋은 악당이다.

오리지널 영화 1편과 2편에서 자파로 분한 뒤 브로드웨이에서도 자파로 외길을 살고 있는 Jonathan Freeman은 이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모범 악당 연기자다. 악당에게 이입할 때에는 그의 껍데기와 객기가 발산하는 뒤틀린 즐거움으로 해야지 그가 인간임을 보이겠다는 욕심으로 해서는 안된다. 분장실의 그를 만나는 영상을 잠깐만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역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느껴진다. (「처음 대본을 받았는데 제목이 알라딘 아니고 자파인 것 같았어요」) 나는 내가 어떤 순간에는 자파같은 사악한 드라마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지하철에서 괴한에게 뚜드려 맞았거나 어려서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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