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 저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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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잘 우울해 나간다.

어제 시간을 내어 하루종일 집안을 돌보고 나서 본가에 내려갔더니 돌아온 오늘 개운하게 마른 이불과 먼지 없는 바닥이 나를 맞아준다. 세상 일은 모두 내가 처한 상황과 내가 하는 행동,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 이 세 가지의 작용으로 굴러간다. 그 중 내가 처한 상황은 잘 이해할수록 좋고 내가 갖는 감정이 더 풍부할수록 좋겠지만,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내 행동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행동을 바꾼다는 것이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우울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우울하다고 누구에게 하소연해본 적도 없고 우울이란 단어로 나를 표현해본 적도 없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것에 감동받고 비슷한 것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우울증과 함께 산다는 얘기를 숱하게 들으면서 아 나는 용케도 안 그렇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곰곰히 내 내면의 감정들을 관찰하면서 내가 우울하지 않았던 것은 우울한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걸 내내 쫓아내고, 덮어씌우고, 없었던 체해왔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실연을 하거나 친구가 큰 일을 당했을 때에 엄습하는 강렬한 슬픔에는 드라마틱하게 좋은 맛이 있기 때문에 긍정하는 법을 알았지만, 평소에 현실이 내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고 내가 내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내가 아닐 그 수 많은 지극히 평소다운 시간에 잠잠하고 하찮게 찾아오는 우울은 애써 모른 척해온 것이다.

특히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내 세대 유행어처럼 느껴져서 더욱 지독하게 입밖에 내기 싫었나보다. 나를 반쯤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나더러 심적 안정을 잘 찾는 것 같고 내면의 무게 중심이 잘 잡힌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를 더 잘 아는 사람들—내가 스스로를 선전하기 위해 써내려간 글 말고 내 평소 습성으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내가 내면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에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 같다고들 하고, 당연히 그들이 옳다. 일을 벌일 때에도 엔트로피를 줄이는 방향으로 자꾸 사고하는 나는 나를 화나게 한다. 우측 상단의 화산은 폭발시키고, 5번 강은 범람하게 두고, 일기가 좀 일기다워야지 자꾸 감정이 아닌 산뜻하게 봉합된 소감만을 보여드리려는 강박을 덜어내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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