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리프레시 휴가를 썼다.

텀블벅에 다닌 지 5년이 되었다. 초등학교도 중간에 한 번 옮겼으므로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 몸담은 조직이 된 것이다.

올해 리프레시(장기 근속) 휴가로 2주를 쓰기로 되어 있었다. 3년 근속시 쓸 수 있는 제도지만 제도 정비가 올 초에 마무리됨에 따라, 나는 만 5년을 기념하는 휴가로 쓰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당연히 여행이었다. 2020은 파리에 있었던 지 1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유럽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 때 같이 있었던 다른 친구 중에도 같이 갈 사람이 있을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연초에 일찌감치 여행이 불가능할 것임을 깨닫게 되고 나서, 중앙공원 벤치에 앉아서 여행 대신 뭘 해야 2주를 잘 쉴 수 있을지 노트에 계획을 짰다. 여행을 능가하는 것을 해야만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계획대로 되었다.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월요일 지하철에서 휴가를 간략히 복기해 본다.

1. 운동

PT를 받기 시작했다. 올해 목표 중 하나였다. 잘 못하는 것, 특히 몸을 쓰는 일을 남 앞에서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격 탓에 운동을 마치 나와 안 맞아서 못할 일로 치부했었다. 첫 PT 직전까지도 내가 운동을 왜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논리를 점검하고 잘못된 이유는 아닌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그러나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잡생각은 없어졌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이었구나…

2. 면허 취득

이 역시 올해 목표였다. 작년에 필기까지만 따 놓고 시간을 못 내서 마무리를 못 했었다. 직접 운전하며 배우는 운전학원 말고 시뮬레이터에 앉아서 연습하는 실내연습장을 선택했다. 불확실한 선택이었지만 그럭저럭 만족한다. 주차 때문에 기능 시험은 한 번 떨어졌다가 재시도에 합격했고, 도로 주행을 앞두고 있다.

3. 심리 상담

세 번째 올해 목표였다. 지인과 SNS 추천을 받아 상담받는 데에 걸림돌이 적을 것 같은 곳으로 찾아갔다. 아직 정식 상담은 두 번밖에 받지 않았지만 크게 만족하고 있다. 내가 하는 짓들이 왜 나한테만 이렇게 안 보일까. 위기 때에 상담도 중요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오다 잠시 여유가 생길 때를 기회로 받는 이런 상담의 가치도 무척 큰 것 같다.

4. 책 출간

리프레시 휴가가 책 출간과 멋지게 겹친 덕분에 첫 출간의 기쁨(과 그에 수반하는 고민들)을 집중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땡스북스에서 북토크를 했고, 책에 도움을 준 친구들을 모아서 같이 기념하고, 거리두기 격상 후에는 인스타 라이브도 해 봤다.

5. 동생 결혼

리프레시 휴가 첫날 동생이 결혼했다. 거리두기 격상 직전이어서, 코로나 이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올해 결혼한 사람들 중 아마 제일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하지 않을지 싶다. 동생보다 내 휴가가 길어서 니가 결혼했냐는 질투를 받았다.

여기까지 쓰니까 열차가 막 동작대교를 건너고, 겨울 아침 해가 강남 쪽에서 붉게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항상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한 해를 급하게 종결해 왔는데, 처음으로 한 발 먼저 정리해 볼 수 있었던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남은 한 달은 조용히 새해를 준비하는 데에 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