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행시험이 취소됐다.

2020년의 목표 중 하나인 운전면허 취득을 위한 도전은 11월에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나는 컨셉 무면허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면허를 못 땄습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을 마치 운전과는 맞지 않는 얼터너티브한 라이프스타일을 견지하는 양 살아왔다. 누가 면허 안 따냐고 물으면 무인자동차 시대가 임박했기 때문에… 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벌을 받고 있다.

가족 여행을 가면 이제 네 명 중 나만 무면허라서 아빠, 엄마, 동생이 번갈아 운전을 하는 동안 나만 뒷자리에서 노래 뭐 틀어줄까 하며 눈치만 보고 있다. (노래도 잘 못 고름) 심지어 지난 봄에 강원도에 다녀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내가 문을 확 제껴 여는 바람에 옆자리 어제 뽑은 그랜저에 흠집이 났다. 운전을 해 봤어야 보험 처리고 뭐고 어떻게 하는지 알지. 아빠가 처리하는 동안 불효자는 차 안에 쭈구리고 있었다.

면허를 따기에 부족한 게 시간이었던 참이라 2주간의 리프레시(장기근속) 휴가를 이용하기로 했다. 직접 차를 몰며 연습하고 바로 시험도 볼 수 있는 운전연습학원들을 먼저 알아보았는데 웹사이트가 너무 형편없어서 도저히 고려할 수 없었다. 모바일 대응 잘 된 번지르르한 사이트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정도가 좀 심했다. 낡았지만 나름의 정돈된 카오스를 보여주는 안양공구상가 같은 그런 것도 아니고 아예 체계랄 것 없이 운영되는 인상을 주는 그런 허접함이었다.

다행히 대안이 있었다. 오락실처럼 운전 시뮬레이션 기계를 갖다놓고 시간제로 연습할 수 있는 실내 운전연습장이었다. 범계역에도 대표적인 체인의 지점이 하나 있었다. 가격도 훨씬 싸고 접근성이 좋아서 이걸로 해 보기로 했다.

시뮬레이터로 하는 운전 연습이 당연히 진짜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 꺾어보고 저렇게 쿵 부딪혀도 보고 하면서 마음껏 연습할 수 있어서 나름 만족스런 훈련이었다. 시뮬레이터 속 세상은 퇴근길 저녁 늦게 들러도 언제나 하늘이 새파랗고 도로 상태는 최상이고 코로나도 없다.

기능시험은 한 번 탈락했다. T자 주차 코스의 거리감이 시뮬레이터의 느낌과는 꽤 달라서 연습할 때보다 너무 오른쪽으로 바짝 붙어서 들어갔더니, 나올 때에 금을 밟지 않을 수 없는 각도가 되었다. 그럴 때 당황하지 말고 그냥 과감히 밟고 감점 받고 나와서 나머질 잘 했더라면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을, 어떻게 할지 몰라 쭈뼛거리다가 금도 밟고 시간도 초과돼서 그대로 실격했다. 감독관이 내리래서 내렸더니 비도 왔다. 비 맞으면서 안산 고잔역까지 걸어오는데 비가 더 쏟아졌다. 비 피하려 들어간 분식집에서 오뎅 먹었는데 현금 없어서 1000원을 계좌이체해 드렸다.

기능 시험 떨어져서 3km 걸었다고 트위터에 썼더니 좋아요 팔백 개 받았다. 다들 열라 떨어졌구나… 열한 번 떨어졌다는 분, 출발선도 못 넘고 떨어졌다는 분들 등 위로를 넘치게 받았다. 그에 힘입어 두 번째 시도 때에는 (똑같이 금은 밟았지만 결단력 있게) 통과했다.

도로 주행은 아무래도 시뮬레이션으로는 한계가 있을 듯해, 누구보다 본인의 면허 취득을 소망하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엄마는 지금 재개발 직전이라 비어 있는 옆 동네 성당 주차장에서 연습을 해 보라며 그리로 데려가 내게 차를 맡겼다. 비록 도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실제 환경에서 운전 연습을 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래 여기다 싶어 다음주에도 가 봤는데 웬 경찰차가 와서 쉬고 있길래 연습을 못 했다. 연습을 같이 하기에는 우리 둘다 너무 새가슴이다.

저번주부터는 아빠가 나섰다. 도로를 놓는 일을 평생 해온 아빠다. 아빠는 공터 필요 없고 바로 안산 주행시험 코스로 가더니 시작 지점에서 날 운전석에 앉혔다. 한바퀴 돌아보는데 시뮬레이터 밖 실제 도로는 과연 달랐다. 좌회전 하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배가 벌어진 채 죽어 있질 않나, 유리가 타이어에 밟힐 정도로 사고가 나 있질 않나, 그 날 따라 체험 도로 현장이었다. 그래도 아빠는 드디어 내가 평생 놓아온 도로에 아들내미가 주행을 할 수 있게 되나보다 하는 대견함에서였는지 좋아, 지금 잘했어, 이렇게만 해 하면서 몇 바퀴를 같이 돌아주었다.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거리두기 격상으로 담당자도 놀랐는지 시험 중단 안내 문자가 다급하기도 해라. 그냥 몇 주 더 주말에 아빠랑 필요 이상으로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큰 불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