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으나 싫으나 나와 함께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기니까 나와 보내는 시간도 길다. 밖에 나가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에 나가고 커피를 사먹고 식당과 술집을 다녔더라면 나를 독대할 시간은 하루 한두 시간 뿐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하루 종일 나와 함께다.

나를 하루종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웃긴 짓을 많이 한다. 양치질을 하거나 화분에 물을 주다가 혼자 거울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오늘은 <당돌한 여자>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그리고 <자나두> 수록곡을 불렀다. 책을 꺼내서 한 장만 읽고 다른 책이 생각나 또 꺼내 읽고 하면서 책상 한쪽에 책이 열 권 넘게 쌓았다가 밥 때가 되면 그대로 다시 꽂아 치운다. 살 찌는 음식은 맛있어서 먹고, 살 안 찌는 음식은 살이 안 찐다니까 먹는다. 식기세척기가 다 돌고 문을 열 때 나오는 김에 얼굴을 쐰다.

집이 정리되지 않은 곳들이 점점 보여서 결국 대청소를 하고 보수 공사도 했다. 한곳에 뒤섞여 있었던 약과 화장품류는 네 개 서랍에 나눠 담았다. 그 전까지는 다 그게 그걸로 보였는데 나름의 기준을 세워 나눠 담았더니 이제 다시는 같은 바구니에 담을 수 없을 것 같다.

하루에 나와 이리도 오래 같이 있으려니까 갖고 있는 생각들도 이건 여기에 저건 저기에 구분해 놓게 된다. 책임, 불안, 외로움, 이런 식으로 쉽게 묶어서 부르는 느낌들이 따지고 보면 다 달랐다. 하나인 줄 알았던 게 따져보면 여서일곱 가지인 경우도 있다. 같은 주제에 관한 감정도 늘 변한다. 지겨울 정도로 아무 진전이 없는 것 같은 그 사람에 관한 문제도 그 때 다르고 저 때 다르고 또 오늘이 달랐다.

내가 뿜어대는 감정으로 습한데 밖에 나가 누굴 만나 털 수가 없으니 항시 축축. 나는 나를 괜찮게 생각하는가? 나는 나를 다음 사람에게 추천할 만하다고 평가하겠는가? 장 봐와서 냉장고를 가득 채운 직후에는 ‘매우 동의함.’ 자기 전에 못 참고 데이팅 앱을 켰다 끄고 눈 질끈 감은 직후에는 ‘전혀 그렇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