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잣을 먹으며 나아간다.

작년 말에 상담 선생님이 낱장 달력과 싸인펜을 주면서 새해의 월별 느낌을 그림으로 그려보라 했다. 1~2월에는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리는 느낌을 그렸고, 3~4월에는 그것이 여기저기 싹을 틔워서 물을 주고 해를 가려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림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나면 그게 주렁주렁 열매를 맺겠지. 그러니까 아주 평범하고 모범적인 기업 분기별 계획 같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연초에 직장 안, 직장 밖을 가리지 않고 오는 모든 기회에 YES를 했다. 글은 글대로 더 쓰기로 했고, 모임은 모임대로 다 하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작년에 내 집을 꾸미고 나서 남의 집 꾸밀 일도 생겼다. 직장에서는 조직이 개편되고 역할이 바뀌면서 지난 5년간 벼르고 벼려온 일들을 드디어 해볼 수 있게 됐다. 다 하니까 저번주에 올해 1호 몸살이 태풍처럼 지나갔다. 열이 확 올라서 코로나 검사도 받아봤다. 나타샤 누나가 비타민을 선물했다.

열나게 살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또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할 때에는 엄마와 물물교환을 통해 얻은 백잣을 한 줌 약처럼 먹는다. 기름지고 복잡쌉싸름한 맛이 나를 기능하게 하고 괜찮게 한다. 백잣을 얻기 위해 엄마에게 준 건 탈각 피스타치오다. 스스로 허락한 야근을 할 시 한 줌 털어먹을 수 있는 것중에 가장 고급스런 것들이다. 약 대신 비싼 견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고급 취향을 가진 다람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