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도 사자도 잘 모르겠다.

청계천로

주말에 광주에 가려고 차표를 끊다가 생각하니 마지막으로 간 게 4년 전이었다. (비엔날레 곱하기 2) 요즘에 웬만한 얼마 지나지 않은 일들이 다 5년 전 이렇다. 지금의 삶의 방식, 그러니까 서울에서 아등바등하면서 살다가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기차로 가기 편한 다른 도시에 잠깐씩 갔다 오는 것이 충분히 익숙해졌다는 반증이다. 기차로 가기 편한 도시는 대부분 역전에 괜찮은 중국집이 있고, 번화가에는 젊은이들이 지역별로 길이가 다른 바지를 입고 다니며, 많이 걷다 지치면 왠지 눈앞에 보이는 맘스터치에 가게 된다. 생각만큼 서울과 다른 어떤 공간 감각이라거나 하는 것은 느끼기 어렵다. 서울이 워낙 커서 서울 속에 대도시도 여러 곳 있고 소도시도 여러 곳 있고 새 도시 낡은 도시 다 있어서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역할을 해온 그런 진짜로 특별한 곳들을 내가 알기에 나는 너무 뭘 모른다. 앎을 덮은 모름이 두껍고 질겨서 앎을 파낼 수가 없다!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게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엔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도시를 도시공학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건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자본가의 관점에서, 행정가의 관점에서, 이민자, 어린이, 사진가, 데이팅 앱 유저, 아마추어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방법이야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이라는 것이 사실 어느 대학 어느 교수, 또는 어느 인문학 베스트셀러 작가가 서로를 엄청 참고하며 제시해 놓은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 맛의 조합과 변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요즘에는 든다. 도시를 어떻게 좋아하세요? 라고 해 보면 대부분의 있어 보이는 답들이 몇 가지 유형으로, 마치 실 조각들이 꼬여서 타래가 되듯이 수렴한다.

검치호랑이

그건 당연한 일일까? 도시 대신 사자를 좋아한다고 치면 다를까. 사자를 좋아하는 방법도 비슷하게 유한하다. 사자를 생물학적으로 분류하고 진화의 계통을 따라가볼 수 있다. 검치호랑이 같은 ‘마카이로두스아과’는 저렇게 세 보이는데도 멸종하고 사자가 속한 ‘표범과’는 살아남았구나. 아니면 암사자와 숫사자의 생태를 관찰하며 거기에 젠더에 관한 인간 사회학적 비유의 색안경을 써볼 수도 있다. 오늘 본 기사에는 남아공에서 재미나 과시를 위해 수많은 사냥용 사자가 사육되고 있는데 이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동물권의 측면에서 사자를 좋아할 (어쩌면, 의식적으로 덜 좋아할) 수도 있다.

분명히 좋아하는 방법이 여럿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셀 수 없지는 않은 것 같고, 한번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한계가 마치 3차원에 갇힌 4차원 사람처럼 답답해지는 건 왜일까. 사실 사자를 제일 잘 좋아하는 방법은 아마 내가 사자이고 내 곁에 있는 사자(‘기환이’라고 하자)를 열렬하게 지지하고 존경하고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위로하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도시 또한 내가 도시에게 무엇일지를 생각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좋아하는 방법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겠지. 하여간 내가 도시여야 도시를 마음껏 좋아할 수 있을 테니 더욱더 도시가 되려고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