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인생 자평

2017, 2018, 2019, 2020에 이어 2021 한 해를 산 나에 대한 평을 쓴다. 나를 위해 먼저 쓴 다음 가공을 거쳤다.


총평

2021은 나의 솔직한 욕구를 생활과 일에 조금 더 정직하게 반영시키는 한 해였다. 좋아하는 일을 더 제대로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 잘 챙기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운동은 올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 주 3회 트레이닝을 시작한 지 1년을 넘겼다. 이제 누가 나더러 운동을 잘한다고는 하지 않을지언정 운동을 안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몸은 체지방은 줄고 근육은 늘었으며 비틀어진 골반과 잘못된 걸음걸이, 뭉친 어깨가 나아졌다. 자세한 것은 며칠 전 별도로 호들갑.


마음

3주 1회 심리상담을 시작한 지도 1년을 넘겼다. 큰 변화가 있을 때에는 조금 더 자주 하는 식으로 빈도를 조정해 가며 같는 선생님과 계속 얘기하고 있다. 내가 나와 현실을 반추하는 주된 방식은 그간 글쓰기(나와의 대화)였는데, 상담은 그보다 비용이 더 드는 대신 훨씬 객관적이다.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상담하는 것의 장점을 톡톡히 느끼고 있다. 하는 일, 게이로 힘차게 살아가기 같은 비교적 진입하기 쉬운 주제들 뿐 아니라 몸, 섹스, 죽음 같은 주제에 관해서도 더 많고 정직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변 가까운 사람에게 상담처를 추천해 좋은 결과를 도운 것도 뿌듯한 일이었다.


살림

이사한 집에서 세 번째 겨울이 찾아왔다. 이 집에 나를 최적화시키는 일은 이제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대신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집 만들기에 참견하기 시작했는데, 본가 거실 인테리어를 바꿔주고 동생네 신혼집 옷방도 손수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변화는 남현동에 절친 둘과 함께 작은 작업실을 만든 것이다. 방 두 개짜리 작은 빌라를 거실과 오피스 두 개가 있는 공동 작업실로 만들었다. 처음 지은 집 이름이 테이큰이어서 새로 지어야 하지만… 우리 셋은 이 곳에서 글도 쓰고, 재택근무도 하고, 모임도 갖고, 비상 거처로도 사용하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맞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모일 곳이 있다는 게 이렇게 사치스런 행복이었지.


어울림

이어지는 얘긴데, 철들어 친구들 소중한 걸 좀 깨달았다고 할까? 작년에 책이 나온 이후로 유독 지금 이 도시에서 나와 함께하는 친구들에 대한 마음이 확 커졌다. 생일선물에도 좀 더 신경을 써보고, 놓치지 말고 챙겨야 하는 것들을 조금 더 진지하게 챙긴다. 올해의 주인공인 오스깔, 제니, 나타샤 누나 등 나를 이미 먼저 챙겨주고 있던 친구들을 보고 되풀이한 것뿐인데. 친구들에게 너무나 고마운 한 해였다.

올해는 연애를 하지 않았다. 몇 명 좋은 사람들은 만났지만 연애가 되지는 않았다. 연애하지 않고 일 년을 보낸 건 정말 오랜만인데 불만 없다.

얼마 전 친애하는 전나환 작가가 세상을 떠난 것은 큰 슬픔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그의 기억을 소중한 곳에 간직하며, 여기보다 편하고 복된 곳에서 잘 지내기를.


벌이

텀블벅에서 일한 지 육 년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동지였던 창업자가 10년간의 세월을 뒤로 하고 팀을 떠난 것은 매우 큰 변화였는데, 모회사에서 제공한 훌륭한 새 리더십과 응집력을 발휘한 팀 덕분에 변화의 시기를 만족스럽게 잘 보냈고 사업상의 결과도 좋았다. AS-IS와 TO-BE 사이에서 역할을 한정짓지 않고 팀의 변화에 동참하고 관리한 경험은 일하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내 고집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버리는지가 매우 중요했고, 이 부분을 치열히 고민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텀블벅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0% 뉴스레터를 통해 프리즘오브, 낫아워스 같은 창작자를 인터뷰하고 또 스티비 팀의 초대로 인터뷰를 한 것도 올해의 뿌듯한 일이다.

내 작업실 외에도 지인들 인테리어를 도와주는 일을 사이드 프로젝트로 두 건 진행했다. 첫째로는 봄에 완성한 강원도 양양의 한 별장형 숙소. 인스타에서 내가 쉴 새 없이 집 고치는 걸 본 지인의 제안으로 구상부터 리모델링, 운영까지 전 과정을 함께 했다. 업체를 선정하고 공사 디테일을 정하고 소통, 감독하고 예산을 염두에 두고 퍼니싱하는 데까지 무척 재미있는 도전이었다. 완성된 집에 친구와 지인들도 가서 지내보게 할 수 있어 더욱 뿌듯했다.

두 번째는 현재도 진행 중인 제주 한림의 작은 단지 아파트. 양양도 수도권과 달라 어려웠는데 제주는 또 다른 얘기였다. 일은 까다롭지만 덕분에 수시로 제주에 갈 일이 생긴 걸 충분히 누리고 있다.


지음

올 초부터 친구들과 함께 Overlap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모임 겸 블로그를 하고 있다. 오버랩은 한국어와 영어, 한국과 한국이 아닌 곳, 소수자성과 다수자성, 정식 작업과 습작 등 여러 대립항의 겹치는 영역을 뜻한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우리는 총 4개 호를 지어내고 그것을 구실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걸 통해서 발표하는 글과는 다른 실험도 해보고 통하는 새 친구들도 만들 수 있어 지적으로 좀 더 풍족해진 한 해였다.

그 밖에 디렉토리 매거진에 이솝 핸드워시에 대한 글을 싣고 현재 발행을 준비중인 패션 서적의 번역을 감수하는 등의 활동도 있었다. 고아웃에 일반인 화보 실린 것도 웃겼다. 하여트 본업과 부업으로 바빴지만 창작을 아예 놓진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음 책은 아직 물음표 속에 있지만…


다님

시대의 영향으로, 또 연애 휴지의 영향으로 여행은 많은 부분 생략되었으나 전술한 양양, 제주 프로젝트 덕분에 바다를 볼 일이 많았다. 양양 하조대 지역의 먹을 만한 밥집 다섯 곳 정도를 모두 섭렵했고, 한림읍의 훌륭한 이탈리안 식당에서 혼자 쓰리코스 식사를 한 것도 즐거웠다.


누림

올해 내게 가장 큰 위안과 웃음을 준 동시대 한국 미디어 콘텐츠 생산자를 꼽자면: 영혼의 노숙자, 너에게 가는 길, 닷페이스. 그리고 가장 기념할 만한 올해의 문화적 사건은 내가 사랑하는 최재원 시인의 김수영 문학상 수상. 필요 이상으로 몰입한 서사는 더 크라운.


올해는 유별났지만, 유별나지 않았던 해는 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저기서 저 또는 저의 흔적을 만나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새해에는 골때리고 웃긴 일들이 우리 위주로 많이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되게끔 하는 일을 더 찾아 나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