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태어나기를 장마철에 태어나서인지 나를 낳으려고 병원에 가는 길이 쓰러진 가로수에 막혀서 돌아갔다는 얘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려서부터 늘 내 생일에는 비가 왔었고 나는 그게 정말 좋았었던 것인지 그걸로 투덜대기보다는 좋아하고 싶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대학교 지원 에세이에 그 어떤 가족 우정 역사 인류애 원대한 꿈 삶의 목표 그 어떤 웅장한 이야기도 없이 저는 비오는 날이 좋은 사람입니다 산성비를 매일같이 맞아서 머리가 패트릭 스튜어트처럼 되더라도요 같은 문장만 서너 페이지를 써내었는데 그걸 본 담임선생님은 넌 앞으로 글은 안 쓰는 게 좋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어제는 밤늦게까지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비에 쓸려간 사람 비와 싸우는 사람 비를 헤집는 사람 비에 우리가 잃은 사람 얘기를 들으면서 비오는 날을 좋아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온 비를 어쩌지 못하는 도시 좀 더 구체적으로는 비는 똑같이 내린대도 비 맞는 땅은 고르지 않다는 점을 자꾸만 비밀로 하는 도시를 향해서 부아가 치밀고 그렇게 새벽에 비를 그냥 맞으면서 요 앞에 나갔다 오는 동안에 비에 젖는 게 전에는 좋았었는데 지금은 왠지 그 비에 원망과 분노가 섞여있는 것 같고 아무렇게나 맞았다가는 상처마다 파상풍에 걸릴 것 같고 그래서 금방 집에 돌아와 문이란 문을 꽁꽁 닫고 밖이 보이지도 않게 블라인드를 치고 흉흉한 날이라고 생각했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집안일 몇 개를 비효율적으로 해치우면서.

사람이야 함부로 좋아하면 후회한다는 걸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비오는 날에 대한 사랑은 영영 지속가능한 줄 알았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고 나처럼 누군가는 쨍쨍한 날에 대한 사랑을 누군가는 펑펑 내리는 눈에 대한 사랑을 누군가는 계절의 변화와 세월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전만큼 마음껏 하지 못해서 속상해하고 있을 것이고 뭔가를 사랑하는 모든 일에는 이제 죄책감이 따르고 그런 각종 마음을 모아서 해낼 일이 있고 그런 일을 해내는 것에 비하면 세상 대부분의 일들이 사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일정을 중단하고 가는 길을 바꾸는 순간들 그 순간에 지금보다 어릴 적 내가 훨씬 현명했다고 느끼며 다시 힘내서 비오는 날을 좋아하기로 하고 비오는 날을 맘놓고 좋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달라는 주문 그것이 그 때의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였구나 깨닫는 것이다.

  1. 마말

    비오는 날의 향 향수를 좋아하던 괜저님

    1. 김괜저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오랜만이고 반가운 마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