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닭이 잘 보인다.

시력 0.3으로 25년을 살았다. 아직 그보다 크게 나빠지지 않고 있음에 감사. 안경은 내게 머리카락과 수염만큼 익숙하다. 전 직장에서 서로 얼굴 그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한 명이 내 얼굴을 한붓그리기로 완성해 박수를 받았다. 까만 머리, 까만 수염, 동그란 안경.

익숙하다는 것은 없는 것이 두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글라스를 못 끼는 이유다. 아니, 선글라스에 도수를 넣으면 된다는 걸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안경에서 선글라스로 갈아타는 순간에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안경을 벗다가 세상 바보같은 모습이 연출된다는 것을 모를 줄 알고.

렌즈를 껴보자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실제로 19세에—머리를 ‘카키 그레이’로 탈색했던 그 해에—평생 쓸 줄 알고 하드 렌즈를 맞췄지만 몇 달 못 쓰고 관뒀다. 그나마 탈색까지 하니까 아예 딴사람 같은 생경함이 있어서 그 정도 견뎠던 것 같다. 눈의 이물감도 거슬렸고 안경 없는 내 얼굴도 거슬렸다.

그래도 작년에 이것저것 습성을 깨보려고 집 근처 렌즈 집에 홀린 듯 들어갔다. 시력에 대충 맞는 기성 소프트렌즈로 시착을 해보려는데 한 시간 넘게 시도했으나 기어이 실패했다. 전문가 양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눈은 너무 작고 렌즈는 너무 크고 중력은 너무 강하고 손가락은 너무 둔하고 피부는 너무 기름지다. 그 뒤로 오기가 생겨서 집에서 거짓말 아니고 약 350번 정도 시도했는데 겨우 저번주에 한 번 성공했다. 한 쪽만 일단 성공하니 그것도 문제였다. 다른 쪽까지 성공하는 데에 한 시간이 더 걸려서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딱 하루 쓰고 살아보니까 15년 전과 제자리. 안경 없는 내 얼굴이 너무 남의 얼굴이라 적응 못하고 실패.

운동할 때에는 안경을 쓸 수 없으니 시력이 내려가는 것은 나의 기본 세팅이다. 너무 안경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심지어 청바지 주머니에 넣고 바지를 둘둘 말아서 락커에 넣기를 한두 해… 흠집투성이가 된 알을 바꾸면서 조금 버릇이 고쳐져서 요즘은 지퍼에 닿지 않게 운동가방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어서 옷걸이에 건다.

앞이 잘 안 보이니 오히려 운동에 집중할 수 있다. 랙풀다운을 할 때 내 얼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그러지는지 너무 높은 해상도로 보고 싶지는 않다. 코치님 중 한 분이 너무 잘생겨서 신경이 쓰이는데 운동할 때 만큼은 잘 보이지 않아서 편안하기도 하다.

오늘은 운동이 끝나고 안경이 든 가방을 사물함에 넣은 채로 나와버렸다. 저녁을 거르고 운동했더니 배도 고프고 굳이 돌아갈 힘이 없어서 그냥 집으로 향했다. 눈앞은 0.3이지만 봄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날씨. 삼거리를 건너는데 거기서 약 백 미터 떨어진 건널목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요일을 딱히 정해두지 않고 내키는 대로 오시는 전기구이통닭 트럭 자리다. 그러나 시야에는 뿌연 행인들과 차들의 형상뿐, 게다가 마을버스가 가로막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저기에 통닭 트럭이 있다는 사실을 육감으로 확신했다. 발걸음에 이끌려 가보니 역시나. 송금 앱 최상단에 작업실 집주인 다음으로 위치한 통닭 사장님 성함을 노룩 클릭해 팔천 원 송금. 무는 괜찮아요 맛소금만 주세요. 양념도 됐어요? 맛있는데. 매번 하는 똑같은 대화다.

집에 와서 어김없이 올라온 동생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통닭을 반쯤 먹는다. 좋아하는 부위를 오늘 맛소금에 찍어 먹고 남은 살은 내일 잘게 썰어서 셀러리나 사과를 좀 넣고 머스타드와 마요네즈로 버무려 샌드위치나 샐러드 토핑으로 먹는다. 파리 시장에서 파는 통구이 닭에 알감자와 샐러드를 같이 먹던 그 맛에 필적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몸에 있는 힘을 다 쓰고 난 하루의 끝에 집에서 통닭을 먹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까만 머리, 까만 수염, 오늘은 안경 생략.

  1. Sohmm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글이 왜이렇게 chill해 지셨어요 ㅎ

    1. 김괜저

      그러게요. 좋은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