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에 쉬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기꺼이 부지런해진다. 어제까지 회사 일이 고단했지만 그럴수록 일찍 깬다. 눈을 뜨자마자 간밤의 꿈을 노트에 적었다. 늘 그렇듯 뭔가 터지거나 고장나거나 잃어버리는 꿈이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부탁 받은 간단한 일 하나를 끝냈다. 집에 디카페인 원두만 있어서 큰 얼음 위에 내려 마셨다. 원두를 갈 때 나도 몰래 곱게 가는 습관이 있는데 굵게 갈기 위해 신경을 썼지만 원두가 좀 오래 되어서 멋지게 부풀며 내려지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뙤약볕이 양껏 들어왔다. 빨고 건조를 했지만 약간 뽀송함이 아쉬웠던 여름 이불을 베란다에 널었다. 며칠 뒤 손님이 올 예정이라 좋은(시원한) 배게를 베지 않고 깨끗한 상태로 치워 놓았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남영동으로 갔다. 좋아하는 아케이드 안 카페에서 이름이 긴 원두로 핸드드립 커피를 아이스로 마셨다. 가져가겠다고 했는데 못 들으셨는지 유리잔에 주셔서 앉아서 팟캐스트가 끝날 때까지만 마시고 나갈 때 테이크아웃 잔으로 바꿔 달라고 하면서 빨대는 쓰던 걸 쓰려고 입에 물고 안 드렸는데 빨대도 새로 하나 주셨다. 열한 시도 안 되어 작업실에 도착했다. 환기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소개받은 사람과 일 얘기로 통화를 하나 했다. 선물받은 책을 몇 장 읽었다. 분리수거를 내놓고 길 건너 후암동에 생긴 훈제 샌드위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물을 주지 않는 줄 알고 탄산수를 시켰는데 생수도 나오고 탄산수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 점심이 다 닭고기가 든 샌드위치였다.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는 양상추를 많이 넣고 부드러운 식빵으로 덮었더니 입술 모양으로 가운데가 뚱뚱하게 휜 샌드위치였고, 점심에 먹은 샌드위치는 수제 랜치 소스에 젖은 사워도우 빵이 찢어지는 대신 살짝 질겨져서 오래 씹어야 하는 샌드위치였다. 며칠 뒤 오기로 한 친구에게 가볼 만한 곳 목록을 보냈다. 며칠 뒤 가기로 한 곳의 기차표와 버스표가 필요 없게 되어서 취소했다가, 그래도 돌아오는 차편은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오는 것만 다시 예약했다. 이발소 예약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용산을 어슬렁거렸다. 최근에 뭐가 많이 생긴 한강로 3가동. 평소에 사람이 많을 것이 뻔해서 가지 않았던 간판 없는 카페에 평일임을 빌어 가보았더니 자리가 하나 있었다. 핀터레스트로 싱크대가 있는 사진을 수십 장 모았다. 티라미수와 디카페인 드립 커피를 먹고 내 뒤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경쓰여 얼른 일어났다. 오후에도 해가 뜨겁고 한강로 3가동에는 가로수가 없다. 좋은 화장실을 쓰고 싶어서 호텔 로비에 들렀다가 쇼핑몰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산 반바지와 같은 색의 폴로 셔츠가 세일 중이어서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샀다. 아침에 걸치고 나간 지난달 플리마켓에서 얻은 셔츠 하나. 작업실에서 회수해 온 자켓 두 벌. 오늘 산 옷까지 네 벌의 상의가 에코백을 배게처럼 만들었다. 예전에 출신 학교를 통해 스쳐 지나갔던 어떤 분이 팟캐스트를 잘 듣고 있다고 DM을 남겨서 인사했다. 내가 몇 년간 가던 이발소를 지나쳐 지하철을 타고 요즘 가는 동네 이발소로 들어갔다. 가던 델 잘 가지 않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마음 속에 잠시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았다. 새 이발소 사장님은 보라색 티셔츠에 노란색 에코백, 주황색 반바지를 입은 나를 보고 아마도 자유분방하다는 의미로 외국 사람 같다고 말했고 가르마를 바꿔 보는 게 어떨지 권했다. 나는 바꿀 때 바꾸더라도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가르마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SNS에서는 머리와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계속됐고 나는 그 일들을 손에 들어 가까이 보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같은 곳에 내려놓았다. 출국하는 친구가 태풍을 걱정하길래 같이 걱정했다. 팟캐스트 다음 화를 편집했다. 다행히 녹음 상태가 좋아서 일찍 마쳤다. 샐러드에 치킨 텐더를 넣어서 빵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형태만 다르지 사실상 오늘의 세 번째 닭고기 샌드위치다. 내일 있을 미팅 준비차 남의 집 구경하는 영상을 보면서 스케치를 했다. 에어컨을 제습으로 틀어놓고 다음주에 입을 양복을 스팀으로 다렸다. 통장이 벨을 누르고 주민 명단에 사인을 받았다. 쉬는 평일이 끝났다.
명문입니다. 2020년대 서울의 ‘구보씨의 일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