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대문에 있었다.

외삼촌 때문인지 서대문구가 마음 속에서 가까워졌다. 서울을 4호선과 6호선 십자로 접어서 이해하는 나에게 서대문구는 중심에 가까운데도 간발의 차로 발길이 뜸한 곳이다. 숙대입구 작업실에서 직선으로 걸으면 15분이면 서대문역에 도착한다는 것은 전에도 몇 번 해 봐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쪽으로 독립문, 무악재로 이어지는 통일로를 더 걷는대도 딱히 내가 들를 만한 목적지는 나오지 않는다. 서쪽으로 신촌은 목적지 자격이 충분하지만 안산 아래 금화터널은 아무리 걸어서 건널 수 있다 해도 도보의 분위기가 조금 위태롭고 율곡터널이나 서리풀터널에 비해 길이도 길다. 남서쪽의 충정로 역시 남쪽으로 평행한 만리재길에 비하면 재미있는 곳들을 잘 모른다. 이러니 서울에 온 김에- 하고 걷는 도심 산책은 대개 중구나 마포구로 향하기 마련이고, 서대문구에서 정작 도심에 가장 가까운 서대문역 주변은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동네였다.

그나마 서소문아파트는 워낙 시선을 잡아 끄는 랜드마크. 50년 된 아파트임에도 만초천 위에 지어서 재건축이 안된다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지만 지날 때마다 둥근 곡선에 놀라고 도로변에서 즉각 수직으로 시작되는 단지의 근접성에 사뭇 놀란다. 그런데 서소문동은 또 왜 서대문구가 아닌 중구에 있는가. 서소문아파트는 왜 서소문동이 아닌 미근동이라는 곳에 있는가. 미근동에는 또 경찰청과 신라스테이 서대문이 있다. 광화문에 비해 저렴해서 종종 가는 여기에서 외박하고 책을 읽고 핸드폰 보고 조식을 먹고 운동까지 하며 쉬었다. 호텔에 3시 땡 입실해 12시 땡 퇴실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고 작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양에 돌아와 산 지 만 5년이 되니까 다시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얼마나 굴뚝같은지 스스로 테스트하기 위해, 장점이 많지만 단점도 확실해 내가 지불할 수 있는 집값 범위 내로 들어오는 집이 있다고 알려진 동네는 종종 가 본다. 몇 달 전 기차 타기 전에 버티고개에서 두세 시간 보낸 것도 그래서였고, 이번에는 천연동에 가 보았다. 설 연휴를 앞두고 북적이는 영천시장에서 출발해 언덕이 시작되는 곳부터 안산 남쪽 자락까지 천연동이다. 맨 위에 있는 천연뜨란채 아파트까지 가면서 예상보다 가파른 경사에 하고 있던 목도리와 외투 단추를 풀었다. 사당에서 남현동 작업실까지 가던 오르막을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아서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보로 수시로 드나들며 살 수 있는 있는 집은 아닌 것 같아 아쉬웠다. 내려오며 새콤한 닭강정 한 컵을 먹었다.

예매해 둔 〈파문〉(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을 보러 신촌으로 넘어갔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해가 지는 걸 더 많이 느끼고 싶어서 안산(이번에는 북쪽 자락)에 면한 쪽으로 연세대 캠퍼스를 반 바퀴 돌았다. 생각해 보니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오디오북을 들으면서였다. 이 책을 도입부만 읽고 갖고만 있은 지 이 년은 된 것 같다. 긴 연휴를 앞에 두니 갑자기 의욕이 생겨 오디오북으로 이동하면서 이틀만에 다 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좋은 책이었다. 막연히 미국식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의 좋은 예로 워낙 알려져 있으니 학습하고 참고하려던 생각으로 갖고 있던 책이었는데, 그리고 신세대 과학 저널리스트 특유의 미국식 사람-좋음과 줄곧 독자의 손을 잡고 가는 문체가 좀 멋없다고 생각되어 심리적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조심스럽게 흩트리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자유와 인간성을 발견하는 기술이 대단하다고 느꼈고 잠깐이지만 ‘fish’와 ‘unfit’ 사이의 선이 그어지는 순간 나는 지는 해를 마주하며 인적 드문 교정을 내려가고 있었고 하필 지난달 이곳에서 보내드린 외삼촌까지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예매한 영화가 시작하려면 아직 삼십 분이나 남은 시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