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실에 다 와서 다짐했다.

평택지제역

회사에서 하는 일이 커지면서 주중에는 도무지 퇴근 후에 다른 걸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주말에 보상 심리로 뭐라도 하고 어디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이 밟은 풍선의 반대편처럼 부풀어오르고, 그것은 반드시 쉬지 않고 무리하는 결말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천안 사는 친구와 평택에서 만나기로 한 것도 평소였다면 더 나은 접선 장소를 찾았을지 모른다. KTX역인 천안아산 역으로 내가 가거나 수원역 정도까지 올라와 달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작년에 물리적인 중간 지점인 평택에서 만났을 때 비슷한 듯 다른 비수도권 경기 남부 도시를 알아가는 느낌이 좋아서 이번에도 거기로 했다. 토요일에 평택에서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역전에 방을 잡아 묵은 다음, 아침 5시부터 여는 중식당에서 또우장과 요우티아오 사 먹고 올라오면 좋은 1박 2일이 될 것 같았다.

이미 금요일 저녁에 공연을 보고, 토요일 오전에는 팟캐스트 녹음까지 하고 난 뒤였다. 평택행만 해도 분명 무리를 신조로 삶을 삼지 않는 보통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아니었겠지만, 거기에서 멈췄더라면 적어도 일요일 오후는 집에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숨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중의 과로가 욕심은 늘리고 판단력은 낮춘 바, 나는 도무지 무리인 일정 하나를 그 위에 쌓아버렸다. 데이팅 어플에서 만나고 인스타그램으로 넘어와 몇 개월간 대화만 하고 있었던 남자와 잠실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다.

잠실은 그가 사는 천호와 가까운 곳으로 내가 가겠다고 하면서 정해진 약속 장소였다. 사실 잠실에서 누군가와 근사한 첫 만남을 한 기억은 생애에 없다. 내 생활반경에서는 먼 편이고 꼭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곳이다 보니 주말에 시간이 있을 때에만 어쩌다 한 번 가게 되고, 그러면 필히 너무 많은 사람과 너무 많은 롯데로 인해 기가 눌려서 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천안에 기꺼이 가기로 한 것처럼 나를 움직여 완전히 새로운 공간적 배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기왕 처음 만나는 거, 둘 중 한명에라도 가까운 곳인 게 좋다는 생각도 있었다.

평택에서 따끈한 콩국으로 아침 먹기까지는 기분 좋게 성공. 문제는 잡아놓은 점심 약속 이상 없는지 확인차 전날 저녁 보내 놓은 DM이 읽씹 상태라는 것이었다. 하룻밤 보자고 잡은 약속도 아니고 몇 개월 동안 대화를 주고받던 사이이기 때문에 갑자기 잠수를 타거나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평택역에서 집으로 가려면 ITX 경부선을 타야 하고, 잠실로 가려면 SRT 수서평택고속선을 타야 하는데, 나는 DM창을 켜 놓고 역에서까지 고민하다가 잠실행을 선택했다. 그러나 SRT 열차가 평택지제역을 출발하자마자 그는 내 DM 목록에서 홀연히 사라졌고, 혹시나 싶어 확인한 데이팅 앱에서도 나는 이미 차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대도시 게이로 살다 보면 만남 직전 차단 당하는 경험은 숱하게 겪는 일이지만, 그런 걸로 상처를 받는다는 걸 시인하면 할 얘기의 목록이 끝도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다음 남자를 만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기에 보통 잘 늘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놀부처럼 욕심을 부려 90년대 톱스타급 일정에 화룡점정을 찍으려다 벌을 받은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모처럼 잠실이라는 중산층 정상사회의 기운이 가득한 밝은 곳에서 대낮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보겠다고 고속열차까지 타고 상경한 내가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는 듯한 기분이.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자책이 습관처럼 스쳤다. 역시 내가 별로인가. 약속을 깨는 이유를 알려주기 곤란할 정도로 갑자기 별로인가. 그러나 이내 제정신이 들면서, 우리가 서로를 반 년 동안 인스타에서 서로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집 이사하는 얘기, 음식 챙겨 먹는 얘기, 직장 내 사회생활 얘기까지도 하며 지냈는데 갑자기 일요일 아침부터 상대가 만나보고 싶지도 않게 혐오스러워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를 향한 화살을 거두었다. 그 다음에는 상대를 이해해 보려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가, 사진에서는 훤칠하고 귀염성 있는 외모이지만 실제로 보았을 때 굉장히 큰 신체적 장애가 있다거나,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거나, 그 밖에 뭔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편견을 우려할 만한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상대가 안양에서 (그는 안양에서 오는 걸로 알았겠지만 사실은 평택에서) 자기 집 코앞까지 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 변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사라지기를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수서에서 내리니 날이 화창하고 추위도 가셔서, 시간도 있겠다 석촌호수를 지나 잠실까지 걸어가 볼 만한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실을 찍지 않고 바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걸어야 감정도 소화가 된다. 나는 예전의 나였으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용기를 내어 친구 둘에게 이런 나쁜 놈이 내게 못되게 했다고 카톡으로 칭얼댔다. 오스깔은 그에게 향후 10년간 모든 만남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저주를 내려주었고,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잠실역에 다다를 때쯤, 불쌍함과 못남으로 가득한 일기일수록 반드시 써서 이런 기분을 겪는 다른 사람들과 한곳에 있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그 곳이 천안이든 평택이든 잠실이든간에.

탄천교
  1. DH

    글 재밌어용

    1. 김괜저

      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