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퀴어 영화를 보았다.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가 시작되었다. 지난주 회사에서 상반기 가장 큰 일을 마쳤고 글 마감 하나도 끝냈다. 이번주에는 목요일에 서울국제도서전도 다녀왔다. 정말 오랜만에 정적으로 보내고 싶은 토요일이 도래했다. 이탈리아 갔다와서 5~6월 정말 쉬지 않고 달렸네. 오늘은 가만히 좀 있자.

오전에 운동 끝나고 샤워하는 동안 기왕 나왔는데 어딜 갈까 하는 생각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어제 작업실 쪽 용산은 다녀왔고… (편도 35분) 수원 스타필드 가서 안경 좀 볼까? (편도 30분) 너무 뻔해. 의정부 간 지 오 년 넘은 거 같은데 가서 냉면을 먹을까? (편도 1시간 35분) 어제 틴더에서 얘기한 사람이 대전이라 했는데 당일치기로 대전을? (편도 1시간 10분)

오늘은 가만히 좀 있자. 강제로 가만히 있는 데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영화표를 사는 것이다. 〈퀴어〉를 보려고 검색하니 집에서 3분 거리 CGV에서 한 시간 뒤 표가 있는 거다. 옳다구나 하고 샀다. 이제 한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가 관건이다.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오늘 운동 시간이 좀 늦었다 보니 커피를 안 마시고 오후가 된 것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회사가 있는 판교는 주변에 식사거리들은 높은 가격에 비해 영혼의 만족도가 너무 낮은데, 그나마 그걸 달래주는 것이 맛있고 비싼 스페셜티 커피집이 많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보상 심리로 매일같이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는 입맛이 되어 버렸다. 내 동네 평촌은 상권이 달라 그런 커피집이 많지는 않지만, 학원가 한켠에 있는 곳이 원두도 다양하고 드립 후 아이스로 타 주는 비율도 좋아서 거길 자주 간다. (자전거로 편도 10분) 빨리 가서 한 잔만 하고 빨리 오면 되겠다 싶어서 전기자전거로 달렸다.

커피를 마시고 바로 왔어야 하는데 그 골목 건너편에 저번에 봐 둔 귀여운 샌드위치 집이 눈에 밟혔다. 영화 보고 나면 밥 때가 한참 지날 것 같은데. 빨리 먹으면 샌드위치도 먹고 커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매우 샌드위치를 천천히 공들여 하나씩 만드는 집이었다. 나오자마자 입에 쑤셔넣고 쏜살같이 나와서 커피는 포기하고 자전거로 겨우 영화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평촌 CGV는 〈쉬리〉 강제규 감독이 2002년 개관한 주공공이(ZOO002)가 전신이고 당시 해저 수족관 컨셉의 독특한 인테리어로 화제를 모은 곳이다. 중학교 때 〈두 개의 탑〉을 보러 갔던 기억부터 해서 수시로 들락거렸던 곳이자, 영화를 보려면 안양일번가로 나가야 했던 불편이 해소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르고 이 건물도 낡고 이 영화관도 다른 곳들에 밀려 인기가 많이 줄었다. 하지만 평촌으로 다시 이사 오고 나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가 되면서 가장 충동적인 관람은 여기서 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큰 모험하듯 맘먹고 날 잡아 오던 영화관이 지금은 가고 싶은 곳들 다 소거하고 나서 집앞에서 시간을 때우고 싶을 때 가는 곳이 된 것도, 거기서 낮 1시 반 상영관 중앙 복도 자리에 혼자 앉아 〈퀴어〉를 볼 삼십대 남자 관객이 된 것도 묘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때 〈나쁜 교육〉을 보러 이런 여름날 압구정 스폰지하우스에 혼자 갔던 게 퀴어 공간(일시적)에 발을 들인 첫 경험이었다. 그 때 그런 곳에서는 누가 왔는지, 어디 앉는지, 영화가 끝나면 어느 순서로 나가는지 예민하게 신경 쓰는 것까지가 영화 관람의 일부였다. 오늘도 예고편이 끝나고 관객석 불이 다 내려가고 나서야 혼자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고 나는 또 그 사람을 신경 썼다. 단지 모종의 동료로서 신경 쓰는 것일 뿐 치근덕댈 마음은 (지금으로서는) 없는데 그런 디테일을 전달할 방도는 없으므로 속으로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지난주 작업실 화장실 천장 등 유리가 깨져서 왼손 검지를 깊게 베었다. 나이가 드니까 전처럼 빨리 아물지 않기 때문에 너무 꽉 매어둔 반창고로 인해 손끝이 두근거렸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주인공에게서 나는 짜증이 날 정도로 내 옛 연인의 모습도 보고 내 모습도 보았다. 내일 야외 결혼식이 있는데… 그가 입은 흰색에 가까운 옅은 리넨 수트를 보자 너무나 갖고 싶어졌다. 역시 옷이다. 아니 역시 다니엘 크레이그겠지. 어차피 요즘은 옷 지출을 줄이려 하기에 생각을 걷어냈다. 영화가 끝나고 관리가 안 된 로비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몇 분 동안 아까 샌드위치 말고 커피를 마셨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했다. 오늘은 정말 가만히 있었다.

  1. 생각중

    ‘잘 읽으세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1. 김괜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