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만 흐리련다.

⌜비도 오고 하니 요즘 하루 중 몇 시 쯤인지 가늠이 안 된다. 아침에 환하게 해가 뜨면 팔굽혀펴기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오후에 햇빛이 노래지면 오늘 눈 앞의 일만 하느라 계획과 회고에 시간을 쓰지 못하진 않았는지 견과류 한 봉지 먹으며 뉘우치게 되는데, 계속 흐리니까 그냥 저냥으로 하루를 보내기 쉽다.⌟

나는 설렁탕 국물이 어려웠다.

⌜배추, 부추, 팽이버섯, 얇게 썬 양지. 이렇게만 그야말로 때려넣고 설렁탕 국물 넣고 간장으로 간 하면서 끓여 봤다. 맛과 색이 형편없었다. 희뿌연데 간장을 넣으니 탁한 라떼색에, 배추와 부추와 버섯 각각 최적의 익힌 정도를 과감하게 빗나가 있었고 고기는 물론 기름기 하나 없이 뻣뻣했다.⌟

나는 상해에서 다섯 끼 먹었다.

⌜우리 가족은 먹는 것이 여행에 얼마나 중요한지 옛날부터 잘 알았다. 식사 때를 놓쳐 허기가 지거나, 아침에 차가운 커피를 못 마시거나 (엄마의 경우), 저녁 식사에 맥주나 와인 한 잔을 못 곁들이거나 (아빠의 경우), 긴 비행 동안 견과류나 초콜릿이 없거나 (나의 경우), 새로운 나라의 신기한 달달짭짤 과자를 못 사 먹거나 (동생의 경우) 모두 여행 점수가 확 깎이는 […]⌟

나는 양배추 좀 구워 봤다.

⌜화요일에 휴일 하루가 더 있으니 주말이 매우 여유로워서 이틀 내내 머리를 식히며 집안일만 했다. 특히 부엌을 유례없이 깨끗하게 딥청소(‘대청소’로는 전달이 안 됨)했더니 금방 그 부엌을 쓰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마트에 갔는데 아뿔사, 마트 쉬는 일요일이다. 원래는 고기와 야채를 사서 잔뜩 구워 먹으려고 했었는데. 집에 먹을 게 마땅히 없긴 해서 마트 옆 유기농 슈퍼마켓에라도 갔다. 그나마 […]⌟

나는 추석에 어디 안 갔다.

⌜어쩌다 보니 이번 추석은 조촐하게 우리 가족끼리만 보내게 되었다. 추석 전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러 갔다. 할머니는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읽은 신문을 칼같이 접어 노끈으로 묶어 배출한다. 옆 집 할아버지 식구에요, 하니까 옆 가게 주인이 주차자리를 내 주었다. 할아버지는 대뜸 나더러 결혼을 일찍 하라고 한다. 지금 한들 할아버지 세대로 치면 일찍은 아니겠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