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 저렇게

괜스레 저렇게는 김괜저(@gwenzhir)의 블로그이오니 잘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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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하자면 강스파이크를 준비한다.

목도리를 친친 감고 구부정한 자세로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먼 발치에서 봐도 박사님이 틀림없었다. 뉴저지 사무실 아닌 뉴욕 한복판에서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같이 일한 지 벌써 이 년이 되어가는구나. 그 기간을 좀 더 연장하기 위해 이민변호사 사무실을 함께 찾아온 것이었다. 변호사는 취업비자를 문제없이 신청하기 위해 우리 상황에서는 어떤 것들을 신경써 준비해야 하는지, 특유의 높낮이가 분명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바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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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상황이 썩 좋지 않다. 경영상의 큰 결정 여럿을 한꺼번에 해야 한다. 별도로 만들고 있는 앱 관련일은 구체적인 작업들이 진전될수록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많고 잘못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체감하고 있어 마찬가지로 좀 쳐지는 기분이다. 곧 신분이 보장되는 기간이 끝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불확실성도 아주 높아진 데다 내가 깊숙히 관여하는 두 가지 일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기 때문에 중심을 내가 알아서 잡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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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하나 보러 갔다. 갓 졸업한 학생들이 올린 작품이었는데 거창하거나 뻔하지 않고 좋았다. 칭찬으로 잘 쓰지 않는 말을 쓰자면, ‘진솔’했다. 작품에 포도주 마시는 게 계속 나왔기에 연극이 끝나고 V Bar에 가서 한 잔씩 했다. 같이 본 누나들 중 한 명이 최근에 알게 된 대단한 지인 한 분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야말로 벗어나기 힘든 굴레를 벗어나고, 낮은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을 숨처럼 반복하며 살아온 행동력 대장의 한인 여성 이야기였다. 좀처럼 그런 얘기를 내 생활과 연결짓는 편이 아닌데, 어제는 달랐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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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운영하는 박사님에게도,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J에게도, 나는 늘 행동력과 계획 추진력을 주문하는 역할이다. 늘 말뿐인 계획이나 구체적이지 못한 목표는 무용지물이고, 작은 것부터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 행동력에 대해서도 기준이 훨씬 엄격해야 하는데 상황을 핑계로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따분한 종류의 자기반성이라 스스로에게 불쾌하지만, 마음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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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화상전화를 했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답을 주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항상 ‘엄마는 이런 의견이지 않을까’라고 내가 지레 짐작한 것과는 좀 다른 의견을 낸다. 그 의견은 그대로 답이 되는 경우는 적지만, 내가 답을 내리는 데에 대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아빠가 울산으로 옮기기 직전이라 모처럼 식구 셋이서 우리 가족 공인 스포츠인 여자배구를 보러 갔다고 했다. 엄마는 서브를 안전하게 넣으려고 살살 쳐넣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금 밖에 떨어질 위험이 있더라도 강스파이크를 주문했다.

  1. 안여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가족의 의견을 신뢰있게 고려한다는 점이 마음에 드네요. 괜저님의 농도짙은 고민에 다른 분들의 조언이 함께 해 지혜로운 결정 내리시길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본명인지 모르겠는데 이름이 정말 좋네요.

  2. 주문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실 수 있읍니다

  3. 한별

    제가 본 괜저님은 추진력 있는 분이셨는데 ㅎㅎ 바라는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 되시길!

    • 한별님도 좋은 한 해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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