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꿈틀대는 욕구 중에 남들에게 거리낌없이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공표하기엔 민망한 것들이 있다. 비교적 민망하지만 강력한 욕구 중의 하나를 꼽자면, 연극무대에서 예술과 인생이 교차하는 바를 포도주 마시면서 고민하는 서유럽인 또는 뉴욕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오래 된 필름에 메타하게 담아내는 영화를 맨해튼 14번가 이남의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최근(근 1 년) 본 영화 중 여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잘 들어 필립(Listen Up Philip)>, <버드맨 혹은 무지의 기대 밖 미덕(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그리고 <실스 마리아의 구름(Clouds of Sils Maria)> 등이 떠오른다.
그런 영화의 공통점으로는 비평-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장아빔’ 같은 단어를 쓰기 좋게 액자를 겹겹이 쓰고 있으며 뉴욕이나 파리가—또는 그 존재가—필연적으로 부각되고, 그런 영화들에 많이 나와본 배우와 의외인 배우를 의식적으로 병치하는 한편 작가나 예술가를 주인공삼아 세월의 덧없음(ephemerality), 허영(vanity),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mortality) 따위의 주제를 자기가 처음 생각해봤다는 양 다룬다는 것 등이 있겠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런 영화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보기 때문에 평이 대개 좋은 편이지만, 동시에 이런 영화만 숱하게 봐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그래 이 영화야!’하는 일까지는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뿐 아니라 비슷한 범주에 드는 소설 연극 등의 컨텐츠를 몹시 즐기면서도 민망해하는 이유는 여러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우선적으로는 아무도 아시아 이민자인 나를 염두에 두고 만든 적 없는 컨텐츠의 작가에 감정이입하는 스스로가 몹시 도피적으로 여겨져서고, 그것을 제끼더라도 해묵은 부르주아 세계관 속에서 오직 형식적(formal)인 성취에만 몰두하는 작가주의 1.0의 해맑음이 꼴 보기 싫어서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특권적인 컨텐츠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 목록을 완전히 잠식하지 않았으면 해서 마음 속의 CCTV를 가동하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다. 파리 뉴욕대 분교에서 사르트르 연극 이론 수업을 듣고 미국 남성 유대인 소설가 세 명에게 글쓰기를 배우는 뽕을 맞은 나로써는 탐닉하긴 너무 쉽고 자각해 멀리하기엔 잔소리하는 사람이 너무 없는 유혹이다.
그렇다고 이런 컨텐츠를 보고 1세계 특권에 기반한 낡아빠진 메타에만 탐닉하는 게으른 작품이다 라는 식의 반응을 하면, 그 자리에 있는 백인 남성들을 순간적으로 닥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뿐 아무도 그것이 작품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나는 그런 반응에 자못 체념한다는 듯 다시 그걸 빠는 위치로 쭈뼛쭈뼛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매번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댓글 달아요. 저는 언급하신 영화들 중에 버드맨만 봤는데 특히나 취향적으로 쏠리는 나 자신과 맨스플레인하는 영화라며 질색하는 친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며 고민이 많았어요…. 오스카 베이트 등에 대해 이죽거리면서도 매년 챙겨보면서 비웃음을 주고 받는 제 인생을 걸고 격하게 동감합니다.
우리 비밀로 그런 영화 공유 해요 ㅜㅜ
sorry i can’t type in korean now; i’m not sure if we’ve already talked about this before, but wonder what you thought about l’esquive?
아직 못 봤어요! 봐야지.
안녕하세요. 김괜저님 블로그 처음 봤을 때가 5년은 된 것 같은데, 오랜만에 와보니 그대로기도 하고 많이 변했네요. 5년만에야 처음으로 댓글 달아봐요. ny30ny 프로젝트 잘 보고 있어요. 뉴욕에 계실 때 커피 한 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안녕하세요! 이제야 보았네요. 연락드릴게요!
비슷한 맥락에서, 유스도 좋았는데. 아마 취향으로 소비하기 좋은 것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음악도 잘쓰고 영상도 그냥 흘려보낼만큼 흠잡을데없어서. 의식적으로 느꼈던 불편함을 글로 읽으니 너무 공감되면서 한편으로 속이 시원하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