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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유를 쏟았다.

지난주, 일 년 동안 주된 컵으로 사용해 온 도자기제 컵 하나를 깨트렸다. 내가 산 것은 아니고 동생이나 엄마가 대만이었나 여행을 다녀오면서 현지 스타벅스에서 보고 예뻐서 산, 붉은 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컵이었다. 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크기가 적당히 큼지막해서 뜨거운 차도 얼음 넣은 커피도 편하게 마시기 좋았다. 무게가 꽤 나갔기에, 노트북 옆에 식수 컵으로 늘상 두고 마셔도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늬가 있는 이런 캐주얼한 컵의 장점은 딱히 식기라는 생각(주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고 책상 주변에 아무렇게나 있어도 문제없다고 여길 수 있어서,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 퍽 정이 들었다. 사귀는 사람이나 친구 등이 놀러 와서 컵을 주어야 할 때에도 그 컵은 꼭 내가 쓰고 다른 걸 주었다.

그런데 그걸 깨트렸다. 밀린 설거지를 하다가 인위적으로 붙인 속도 때문에 마지막 설거지거리였던 그 컵을 허투루 잡고 닦다가 냅다 싱크대 바닥에 내리쳐버린 것이다. 다행히많은 파편 없이 깨끗하게 세 동강났다. 그걸 버리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컵을 사야지.

뉴욕에서도 컵은 사실 싼 것만 죽 써 왔다. Fishys Eddy의 할인 코너에 가면 일 달러 이 달러 짜리 컵들이 그야말로 쌓여 있다. 그리고 아무리 허접한 벼룩시장이나 중고가게에도 특이하고 얘깃거리가 되는 빈티지 컵들은 늘 널려있다. 그래서 유리컵이라면 두툼한 유리벽에 든든하게 무거운 바닥을 한 큼직한 것들로만 사서 두었다. 오로지 그런 컵 하나로 물도 마시고 우유도 마시고 자몽주스 당근주스 아이스커피도 마셨다. 참 많이 깨기도 하고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기도 했다.

컵 하나에 돈을 쓸 입장은 한 번도 되어본 적 없었지만, 물컵에는 돈 아닌 신경조차 많이 쓰지 않았다. 겉멋에 와인잔은 둥근 것 둘, 길쭉한 것 둘 이렇게 갖춰 놓고 살았으면서. 심지어 와인잔은 거꾸로 찬장 아래 매달아 두는 그 잔 걸이까지 있었다. 손님이 오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손님이 온 날에는 그런 컵들부터 나가고, 투박하고 손에 익은 물컵은 변함없이 내가 썼다.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내 취향을 반영한 식기들은 모두 버리거나 나눠주고 와서 부엌 세간은 전혀 남지 않았다. 올 초 재시작한 자취 이래 컵도 그래서 본가에서 쓰던 아이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깨 먹고 나니까 갑자기 그럴싸한 물컵이 갖고 싶어졌다. 칵테일 잔으로 치면 하이볼이나 콜린스 글라스 정도로 얼음을 넣어도 될 만한 용량의. 그리고 헬카페 스피리터스에서 쓰는 물잔처럼 종이처럼 얇고 얼음막처럼 손아귀에 부서져버릴 듯한 그런 물컵을 갖다놓고 싶어졌다. 아, 그 컵. 내가 그 컵이 참 멋있단 얘기를 하자 도무지 그런 데에 왜 신경을 쓰는지 진심으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동행자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날 나는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이 되었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 컵(일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트위터 친구께서 알려주었다)을 진짜 살 생각은 없었지만 내 머리속 적당한 유리 물컵의 이미지에는 부합하는 것을 그렇고 그런 주방용품 가게에서 찾았다. 폴란드에서 만든 걸 수입한 모양이었다. 꽤 얇으면서도 내가 설거지해도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 같은 적당한 중간을 가고 있었다. 그걸 두 잔 사면서, 컵들은 다른 식기와 함께 이 층짜리 건조대에 아무렇게나 쌓아 말리는 현 상황이 성에 차지 않아 컵 건조대도 하나 샀다. 집에 오자마자 하나를 더운 물로 씻고 행주로 즉각 말려 자몽 주스를 따랐다. 피스타치오를 집어먹으며 마시는데 참 이게 뭐라고 만족감이 어깨를 주무르는 것 같아졌다. 그 날은 잠을 평소보다도 더 잘 잤다.

애석하게도 그 후 거의 한 주간은 여유가 하나도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기대를 걸었던 순간들은 실망을 안겼고, 일은 많고 고되어 마치 모닥불을 스프레이로 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에 퇴근해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좀체 물을 따로 따라서 마실 만큼의 여유가 나지 않았다. 오늘, 공휴일인 내일 휴일을 앞두고 집에 돌아와 불 위에 아무거나 (먹다 남은 불고기, 소시지, 버섯…) 볶아서 밥과 같이 먹으며 귀찮은 나머지 물은 2L짜리 페트병으로부터 아무렇게나 벌컥벌컥 마시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졌다. 마음에 드는 컵을 사 놓고 그 컵이 내게 무한한 안정을 줄 것처럼 기뻐할 때는 언제고.

그래서 난 밥을 대충 먹어치운 뒤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매일우유 한 팩과 편의점 치즈케익 하나를 사 올라왔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정확히 무지개빛으로 꺼져 가는 저녁 하늘을 감상하면서, 따라놓은 우유와 그걸 잡은 내 손이 얇은 유리 덕택에 얼마나 가까운지 흐뭇해하면서 그걸 먹고 마시려고 말이다. 아참, 포크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내 팔꿈치가 잔을 책상 밖으로 떠밀었다. 본능적으로 잔를 붙잡기 위해 팔이 허공을 휘저으면서 우유 오백 미리가 책상과 바닥과 벽과 의자와 티셔츠와 바지속까지 흠뻑 적셨다. 다행히도 잔은 무사하기에, 걸레와 물휴지는 있돼 자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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