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짐 싼다.

짐 싸는 주말이다. 성탄절 아침에 포장이사 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면 되고 작은 원룸 오피스텔이라 그렇게 할 일이 많지는 않지만 이 년 가까이 살면서 연애도 하고 친구도 재우고 취해도 보고 피도 나 보고 울어도 보고 했던 그 감정적인 짐을 잘 싸야 한다.

1. 물건 정리하기

집이 좁다고 짐이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넓은 집에는 짐을 구획해서 정리할 수 있고, 한 공간에 한 가지 성격의 짐을 놓고 그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위아래로 훑어볼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집에는 같은 공간에 짐을 여러 겹으로 넣을 수밖에 없다. 마치 테니스공과 구슬과 좁쌀을 여러 병에 따로 담으면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한데 넣으면 서로 틈새를 이용해 빽빽하게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따로따로 다시 분류하려면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새들아 날아오렴, 잿더미에 콩을 골라다오!)

이번 이사의 가장 큰 골칫덩이는 전 남친의 유물인 풀업 기구다. 운동을 하라는 죄책감을 주는 역할 외에 실제로 쓰는 일은 거의 없다. 버리려고 분리했는데 분리하니 생각보다 옮기기 까다롭지 않아서 또 한 번 유보됐다. 그 밖에 이 년간의 용산 생활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나 찢어진 옷들을 버렸다.

2. 집 원상복구하기

집에 구멍을 많이 냈다. 빌트인 캐비닛 문짝 몇 개는 떼어서 보관중이었고 천정등도 내가 단 것이어서 다 철거했다. 바닥에 깐 체육관용 매트도 벗겨냈다. 그간 올빌트인 오피스텔이라는 호흡곤란스럽게 정형화된 공간을 내것 만들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을 대략적인 역순으로 실행취소하는 작업이다.

3. 살았던 기억 정리하기

아이파크몰 이마트가 다른 이마트와 다를 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익숙해져 버린 그 동선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쓸 데 없는 통화를 하면서 필요한 것들만 착착 집어드는 느낌을 한 번 더 느끼러 갔다. 그리고 이십팔층 짜리 건물에 살면서 너무 십이층 내 전망에만 만족했던 것이 아까워 꼭대기에 올라갔다.

주말에 개발을 하거나 글을 쓰러 자주 가는 카페에 그간 도장 한두개만 찍고 팽개쳐 놓았던 스탬프 카드 네 개를 가져가서 한데 모으고 한시간 남짓 앉아서 주중에 못 하고 넘겨두었던 잡일을 처리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잡일은 잡생각과 병행할 수 있다. 한 달 만나고 카페 일층 구석 자리에서 헤어진 남자. 집에 와인이 있다니까 꽤나 적극적이라고 생각했다는 남자. 용산역 개찰구 앞에서 내가 주말마다 기다리던 남자. 대체 남자를 얼마나 만나려고 사호선 육호선 환승역에 방을 잡았냐는 남자. 여러 나라, 여러 도시, 여러 건물에 살아봤지만 신용산은 어디보다도 연애하는 마음으로 기억될 것 같다.

  1. 이정훈

    어디로 이사하시나요~??

  2. 성수동고양이

    조심스럽게 블로그 눈팅만 하다가 여쭤봅니다
    혹시 사용하시는 카메라 기종이 어떻게 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