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쓴 지 일 년이 됐다.

연애와 술〉이 나온 지 일 년이 됐다. 첫 책을 쓰고 나서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좋은 일은 내가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좋아해 준 것이다. 특히 나와 같은 이름의 경험을 해 본 사람들, 아니면 나의 측근에서 내 견딜 수 없는 면들을 기꺼이 견뎌주고 있는 사람들, 내지는 이 블로그가 옛날에 이글루스에 있었을 때부터 내 글을 읽어준 사람들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고 해줄 때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칭찬에도 가증스런 가짜 웃음만 짓고 말 수 있었던 내가 나도 몰래 못생긴 진심-미소를 주체할 수 없이 짓고 있더라. 이 책으로 인해 나는 조금 덜 혼자라고 느끼게 됐다.

약점인 연애와 술을 제목으로 책을 쓴 경험으로 말미암아 나는 정신의 거북목이, 영혼의 골반비대칭이, 마음의 역류성식도염이 조금이나마 교정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연애 중 어떤 것은 끝난 줄 알았던 후유증이 되돌오기도 했지만 전처럼 그런 증상이 없는 척 애매한 태도로 있지는 않았고 나름 떨쳐내고 현재에 맞는 결정을 하기 위해 힘썼다. 이 책을 보면 아직도 어떤 시절에 대한 나의 미련이 묻어나지만 이제는 그게 내가 아닌 내 책 속에 있다는 점이 나를 나아가게 했다. 독자들에게, 출판사 시간의흐름에게, 책 쓰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오스깔에게, 책에 등장하는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전에 구해놓은 출판사의 허락하에 책의 첫 장을 올린다. 혹시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의 원형은 옛날 옛적에 이 블로그에도 꺼내놓은 적이 있었다. 김괜저 오리진 스토리라고 해야 할지도.



나는 핑클을 좋아한다.

부영초 3학년 2반에 핑클을 좋아하는 애가 총 다섯 명 있다. 다 남자애들이다. 여자애들은 H.O.T를 좋아한다. 핑클을 좋아하는 남자애 다섯 명 중 두 명은 성유리를 좋아하고, 한 명은 이진을 좋아한다.

나와 동준이는 이효리를 좋아한다. 동준이와 나는 쉬는 시간에 내 핑클 책받침을 보면서 이효리 얘기를 한다. 나는 동준이와 이효리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사실 옥주현을 좋아한다. 옥주현은 노래를 잘 한다. 〈블루레인〉이나 〈루비〉 후렴은 거의 옥주현이 혼자 부른다. 옥주현은 키도 크고 성격도 화끈하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남자는 대부분 이효리나 성유리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

동준이는 이효리가 자기 이상형이라고 한다. 나는 동준이에게 이상형 같은 것은 없는 거고 혈액형처럼 사람들이 지어낸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준이는 이효리가 자기 이상형이라고 한다.

나는 사실 동준이를 좋아한다. 동준이는 그림을 잘 그린다. 물론 나도 잘 그리지만. 나는 싸인펜으로는 잘 그리는데 연필로는 잘 못 그린다. 동준이는 연필로 잘 그리고 싸인펜으로 잘 못 그린다. 동준이는 내 앞자리에 앉는다. 동준이는 머릿결이 좋아서 쉬는 시간에 나랑 놀려고 휙, 돌 때에 머리가 착, 하고 움직인다. 동준이가 쉬는 시간에 항상 나랑 노는 것은 아니다. 동준이는 앞 분단 애들이랑 놀 때가 조금 더 많기는 하다. 그런 날에 나는 그리던 그림을 그린다.

일요일은 아빠 생신이어서 엄마가 파리바게뜨에서 초코 케이크를 사면서 사은품으로 주는 CD를 받아 오셨다. 제목은 ‘핑클과 함께하는 파리바게뜨 세상여행’이었다. 컴퓨터로 재생을 해보았다. 주인공 아이가 핑클이 안내하는 신나는 파리바게뜨 세계로 들어가 탐험한다는 내용이었다. ‘뮤직홀’을 누르면 핑클 뮤직비디오 세 편을 편리하게 감상할 수 있다. ‘왕국’을 누르면 파리바게뜨 선전 몇 편을 감상할 수 있다(선전에 핑클이 나오는 건 아니다). 게다가 핑클 화면보호기까지 제공한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이야기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나오고 나서 핑클 사진이 여섯 장 정도 나온다.

나는 CD를 컴퓨터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처음에 받은 대로 ‘핑클과 함께하는 파리바게뜨 세상여행’이라는 글자가 기울어지지 않게 똑바로 넣었다. 그리고 CD를 색종이 두 장으로 감싸서 선물 포장을 했다. 엄마는 아빠한테 CD를 선물로 줄 거냐고 물었다. 아니, 동준이 주려고.

나는 동준이가 사는 관양아파트 402동 102호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동준이네 아줌마의 화난 말소리가 들렸다. 동준이네 아저씨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줌마가 인터폰으로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인터폰으로 누구와 얘기하는 것은 항상 긴장이 된다.

“저 동준이 친구인데요. 동준이 줄 게 있어서요.”

“지금 동준이 못 노니까 집에 가라.”

“저 놀려고 온 거 아니구요, 그냥 이것만 전해주려구요…….”

이미 인터폰은 끊긴 뒤였다.

나는 CD를 동준이네 우유 주머니에 넣어두고 집으로 왔다. 월요일에 학교에 갔는데 동준이는 CD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핑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연애에 대해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컸는지는 잘 모르겠다.

  • 오스깔

    1주년을 맞아 이 블로그에서 이 글을 저 집의 저 불빛 아래서 이렇게 읽으니까 울컥하네. 다시 한번 너를 위해 기뻐. 우리 사이엔 멍석과 휴식과 캐치업의 시간이 필요하다 🙂

  • 해이긴

    좋다. 그냥 그저 좋다! 고마워. 이렇게 계속 글써줘서.

  • 평화

    작가님 책을 읽고 팬이 되었어요. 조용히 응원하는 랜선팬 할게요;) 인스타에서 집고치시는것 보고 호감도가 무척 상승하였습니다. ㅎㅎㅎㅎ

  • 안여름

    책장에 꽃혀져있던 책을 오랜만에 꺼내서 다시 읽고 있었는데… 일주년이었군요. 일년이 지나고 다시 읽어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