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은 하고 싶은 짓을 오래 더 하며 살기 위해 안 하던 짓들을 하기 시작한 해였다.
일 (출근하는)
작년 말 들어간 새 직장은 카카오다. 사실 이 블로그를 통해 나를 보아 아셨던 분의 권유로 들어가게 된 직장(부서)이다. 그 분께 고맙고 블로그에게 고맙다. 카카오 비즈니스의 도구들이 보다 작은 규모 또는 초기의 사업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들을 짜는 일을 해 보고 싶어서 왔고, 이제 일 년 조금 넘게 그런 일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큰 회사이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마침 회사의 격동기에 합류하여 쉽게 얻기 힘든 경험치를 직간접적으로 쌓아가고 있다.
일 (공간을 만드는)
제니와 함께 작업실 〈오드컨선〉(Odd Concerns)을 열었다. 사당 오버랩 하우스를 정리하고 숙대입구로 옮겨 더 크고 높고 밝고 시끄러워도 괜찮게 만들었다. 처음 손 대 보는 60년 된 상가건물 옥탑층에서 화장실 바닥 배관을 수정하고, 골방을 ‘그린 룸’으로 만들고, 영상음향 시설을 갖추는 등의 과정이 녹록치 않았으나 내내 즐거웠다. 이곳에서 팟캐스트도 녹음하고 아티스트 토크도 열고 호영 퇴사 파티도 열고 〈웬만하면 + 여자가 좋다〉 송년회도 열고 그 외에도 여러 크고 작은 모임과 작당모의를 가졌다. 연초까지 전면 재택근무였던 시절에는 제니와 나 둘 다 이곳으로 출근해 눈물나게 만족스런 근무환경을 누렸으나 이후 재택근무가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증발하면서 휴일에밖에 갈 수 없어 한동안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다른 작업실 메이트를 들였고, 사람들을 모으기 좋은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2023년의 자랑거리다.
봄부터 가을까지 틈틈히 호영의 집을 꾸몄다. 망원동은 갈 때마다 이미 내가 부분적으로는 살고 있는 내 동네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걸출한 고양이 구생과 함께 볓 잘 드는 친구 집을 여기저기 손보고 있노라면 더욱 이곳 주민이 된 기분이 되어서 좋았다. 호영이 내게 우정과 고마움의 표시로 손수 김괜저가 집꾸미는 만화를 그려 선물한 사연은 〈웬말하면 말로 해 EP28 – 잔말말고 말로 해〉에서 들어보실 수 있다.
일 (말과 글을 짓는)
호영, 재원과 함께 글을 쓰기로 되어 있는 친구들의 일상을 글 대신 말로 풀어내는 팟캐스트 〈웬만하면 말로 해〉를 시작해 총 36화를 배포했다. 스테디오에서 월 2,000원을 후원하는 말동무만 약 55명 정도가 되었고 11월 휴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빼먹은 적 없이 꾸준히 만들고 있으니 어리둥절할 정도로 뿌듯해하고 있다. 특히 나로서는 가장 오래된 수석친구 재원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신진 우정인간 호영을 격주로 꼬박꼬박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 정말 좋다. 단단히 고인 돌처럼 움직이지 않던 글(에세이) 진도가 우리끼리 글 써서 보내는 웬말 글방 덕분에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그 외의 대외활동이 많은 해는 아니었다. 연초에 자음과 모음 56호에 〈팟캐스트의 두려움〉이라는 글을 보탰고, 그루터기 작은도서관의 초대로 나를 닮은 집꾸미기를 주제로 발표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방금 글 진도가 조금씩 나가고 있다고는 했으나, 나를 하염없이 기다려주던 출판사와의 출간 계약은 양해를 구하고 해지했다. 아직 다음 책의 방향이나 시기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정해 나가려 한다.
사람
팟캐스트 동무 호영 재원, 작업실 동무 제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할 일과 웃을 일을 공유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삶을 우정의 기세로 버텨나가고 있다. 작업실 덕분에 친해지고 싶었던 사이버 인연들을 현물화할 수 있었던 기회도 많았다. 친분의 3D 프린터가 생긴 기분.
연초에 예전에 끝난 연애를 되살려서 짧은 재연애를 했다. 금방 끝났지만 중요한 사건이었다.
가족들은 건강하고 자주 만난다. 2023년 마지막 날인 오늘은 엄마 아빠와 송년 음악회에 갔다가 본가에 와서 아빠 파자마를 빌려 입고 가져온 아이패드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생활
운전을 시작했고, 고장이 났고, 사고를 냈다. 고장도 사고도 동일한 출근길, 동일한 지점에서. 다섯 번 출근 도장을 채 찍기도 전에 이렇게 정신 차리게 하는 일들이 있고 나서 다시 출퇴근 말고 주말 집 근처에서만 하는 운전으로 회귀했는데, 패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았다고 생각할 뿐…
봄에 두 번째 코로나에 걸렸고 겨울엔 독감도 걸렸다. 비결은 계절감 없는 무리한 일정 소화. 그래도 3년째 장기 PT를 받으며 주 3회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올해는 체중을 좀 줄이려 했는데 실패. 이 목표는 고스란히 내년으로 넘어간다. 심리상담은 월 1회 꼴로 계속 받고 있다. 몸과 마음을 남의 도움 받아 돌볼 수 있는 현재의 여건에 감사한다.
동해에 제2의 집을 마련한 우리 가족의 돌아가며 하는 동해 생활은 2년차에 접어들면서 더욱 재밌어졌다. 이제 동네가 익숙해지고 가끔 갈 때의 루틴이 생기다 보니 한 번 가면 깊이 글쓰기나 책읽기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여기에서 Alexander Chee의 에세이 강좌도 들었고, 번역 작업도 시작했다.
여행
4월에 니가타와 도쿄에, 6월에 서귀포 표선에 가족과 함께 다녀왔다. 니가타에서 멀리 보이는 설산맥과 표선의 썰물.
10월에 파리와 베를린을 다녀왔다. 대비하여 카메라도 새로 샀다. 파리에서는 제니와 함께 며칠을 지냈다. 강렬한 노스탤지어의 공격에도 의연했던 나.
부산, 대전, 울산, 강릉에 짧은 여행을 군데군데 넣었다. 몸을 혹사시키는 성향을 거슬러 쉼을 꾐한 시도들.
문화
24편의 장편 영화를 보았고 그 중 13편이 올해 개봉이었다. 사랑에 빠질 만큼 특출난 작품은 만나지 못했고 〈Tenet〉 〈007: Casino Royale〉 〈Triangle of Sadness〉 〈The Whale〉 정도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는 유일하게 2007년부터 본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서 지금은 그 때의 절반도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는 버릇이 있다.
올해는 영화보다 더 많은 공연과 전시, 행사에 다녔지만 사진을 남기는 것 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발레, 현대무용, 뮤지컬, 클래식 등의 공연과 영화제, 도서제 등 바삐 다녔는데… 새해에는 이런 행사들도 좀 기록을 해두는 게 좋을까.
나의 독서는 언제나 그 질과 양이 부끄러워서 기록하거나 공개할 수 없다고 느낀다. 책이야말로 새해에는 기록을 시작할까? 창쉐 〈황니가〉, 박완서 〈그 남자네 집〉, Ted Chiang 〈Stories of Your Life〉, 최현숙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Edmund White 〈Inside a Pearl: My Years in Paris〉 등은 읽은 뒤에도 곱씹었다.
유튜브 뮤직에 따르면 올해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 이랑의 〈삶과 잠과 언니와 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웬말하면 여자가 좋다〉 파티 때에 가라오케 반주자로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노래가 튀어나왔다.
2023에 쏟아진 수많은 띠용한 세상 돌아가는 일들 속에서, 나는 점점 내가 존중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관찰하고 응원하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어떠한 개념으로 생각하고 이상한 수식에 넣어서 셈하듯이 옳고 그름, 이김과 짐을 판단하려 드는 경향에 개인적으로나마 저항하려 노력했다.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나에 저항하는 것도 되어서 편치많은 않았지만… 내가 의존하고 의견을 외주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이나 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 찾지도 말고 되려고 들지도 말자. 같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가까이 다가가자.
이번 인생 자평 셀카가 아주 멋집니다.
동감합니다.
괜저 님의 사진에 대한 글을 보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사진에 대한 글을 가만히 써본 적은 없네요.